변두리생각

첫 눈 오는 날에

변두리1 2014. 12. 7. 08:49

첫 눈 오는 날에

 

 

  문을 여니 흰 눈이 풀풀 내리고 있다. 반가우면서도 한편은 당황스럽다. 예년보다 보름정도는 빠른 듯. 생각지 않은 때에 불쑥 찾아온 반가운 옛 친구처럼 좋기는 한데, 예상 보다 일찍 도착해 맞이할 준비가 덜 되어 당혹스러운 그런 느낌이다. 홀연히 겨울이 우리 곁에 와 있다. 아침시간이 분주하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한 해가 다 간 것 같고 따듯한 방안이 그리워진다.

 

  길을 나서니 가로수 풍경이 이채롭다. 단풍이 미처 지지 못한 채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는데 그 위로 눈꽃이 피었다. 늦가을 오후의 단풍든 모습이 한겨울 이른 아침의 차고 맑은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계속 눈이 내리는 거리의 풍광이 낯설다. 탐욕과 허영에 찌든 이들 앞에 마술처럼 순백의 새 세상이 옮겨 와 있다.

  푸근히 내리는 첫눈이 하늘에서 땅으로 뿌리는, 무뎌진 감정을 새롭게 벼리는 하늘 숫돌의 편린들 같다. 자연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베푸는 연례적 선물 중 하나가 첫눈이다. 많은 그리운 이들이 이 날에 기대어 약속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하고 별일이 없어도 마음이 들뜨는 첫 눈은 눈 내리는 곳에서 축제를 펼치는 날이다.

 

  눈은 공중의 수증기들이 합쳐져 무거워져서 지상으로 떨어질 때 낮은 온도에서 언 겻이다. 무거워 떨어지는 것이 눈이라면 그것을 보면서 경고를 받고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을까. 이 땅에서도 너무 많은 것을 모으고 쌓고 수다한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 오르는 것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얽히고 고착되는 것이며 오히려 줄이고 비우고 홀로되는 것이 자연에 가까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길은 아닐까. 눈은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밟히고 녹아진 후에야 다시 비상을 꿈꿀 수 있으니 어려움에 처하고 낮은 자리에 있음이 절망의 여건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환경이라고 여기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내 어린 시절의 겨울은 몹시 추웠고 눈도 많았다. 산과 밭에는 눈이 허옇게 쌓이고 처마엔 고드름이 맺히고 방안의 물도 꽁꽁 얼어붙곤 했다. 아이들은 옷이 허술하고 바람은 매서워서 동상에 걸리고 콧물을 흘렸고 물도 불도 흔치 않아 잘 씻지 못했다. 손발이 갈라지고 얼굴이 트기 일쑤여도 신이 나서 들로 산으로 나돌며 팽이치기 썰매타기 연날리기에 바빴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겨울이면 주로 집안에서만 지냈다. 찾아갈 친척도 없었고 추위 속에 갖고 놀 기구도 만만하지 않았다. 한 가지 방송만 줄기차게 송출했던 스피커와 우리 집을 사랑방으로 알고 찾아오곤 했던 어른들을 뵙는 것 그리고 몇 권 안 되는 책들이 나의 대화의 상대였고 모든 세상이었고 즐거움이었다.

 

  눈이 오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너무도 힘든 세월을 사시다 가신 어머니. 겨울을 맞을 때마다 염려와 근심을 담아 김장과 연탄 수백 장 더하여 쌀 한 짝 준비해 놓기를 당부하셨다. 힘든 세상을 이불처럼, 떡가루처럼 덮어 주는 흰 눈처럼 우리 선조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생각하고 낮은 곳을 돌아보는 마음가짐으로 훈훈하게 살았다. 마을이 곧 일터요 놀이터요 학교여서 마을사람 모두가 일가친척이요 동료요 이웃이었다. 힘겨워도 함께 하면 따듯하고 풍성하지만 아무리 넉넉하고 풍부해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외롭고 각박해진다.

 

  눈이 내리면 모두가 평등해지는 느낌이다. 차별 없이 모두를 향해서 축복처럼 쏟아지고 눈을 대하는 사람들의 정서도 대개는 비슷하다. 가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어릴 적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사람을 만들던 추억들을 떠 올리며 눈 속에 뛰놀던 고향을 그리워하리라. 이제는 어느 곳에선가 착한 마음가지고 살아갈 훌쩍 커 버린 어쩌면 반백이 되었을 옛 친구들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해 주기를 기대하리라.

 

  많은 나무들이 잎들을 떨어뜨리고 맨 몸으로 추운 겨울을 맞는다. 우리도 덕지덕지 붙은 욕망과 허영을 떨치고 나면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매인 것이 없으면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가진 것 없으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은총을 더 쉽게 받는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면서 순백의 세상에서 뛰놀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선물 같은 첫 눈이 되어서 참으로 좋았다. 올 해는 첫눈이 오래도록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