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통곡(하갈)
슬픈 통곡(하갈)
내 운명은 왜 이리도 기구할까. 내 삶의 황금기 삼십 년 가까이를 한 가문 더 좁게는 한 사람을 위해서 살았지만 결과는 그 집에서 내가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억울하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나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내 삶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생존을 위협받는 수준으로 전락해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다. 자비롭고 정이 많기로 소문난 주인도 고통당하는 이들의 편이라는 그들의 신도 다 내게는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잘 풀린 것인지 한 없이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내 삶의 극적인 변화는 이십오 년여 전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그 당시 이집트 왕궁의 노비였었다. 내 나이 스물 남짓. 그래도 그 때가 좋은 때였다. 어느 날, 흉년 든 가나안에서 한 무리의 난민들이 이집트로 흘러들고 그들 중 한 여인이 기막힌 미인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마침내 그 여인이 왕궁으로 불려왔다. 과연 미인이었다. 왕에게는 처녀라 했지만 사실은 남편이 있었다. 그 여인은 그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을 그들의 신(神)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오히려 많은 재산을 얻었다. 이집트의 왕은 너무 놀랐는지 그 여인의 미모에 반했는지 그들을 융숭하게 대했고 그 때에 나는 선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나는 내 인생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었고 흥분과 기대를 누를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브엘세바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 나는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웠고 그들과 다른 인종이란 것이 매력이 되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언제나 쉽게 그들의 눈길을 끌었다. 여주인이 아이를 낳지 못해서 집안이 적적하고 늘 한 구석에 그늘이 있었다. 내가 합류한지 십 년여가 지나갈 때에 여주인은 나를 가문의 대를 이어줄 여인으로 선택했다. 어쩌면 후손을 얻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탓인지 가려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선택된 것이 싫지 않았다. 여주인이 나를 인정했다는 것이고 후계자를 낳으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나는 곧 아들을 낳았다. 가문의 모든 이들이 즐거워했다. 단 한 사람 여주인만 빼고서. 여주인은 질투가 심하고 성격이 까칠했다. 많지 않은 나이에 모두가 인정하고 위해주니 내가 분수에 지나친 면이 있기도 했지만 여주인은 나를 시기 질투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도 주인은 우리 모자를 눈에 띄지 않게 항상 배려하고 마음 써 주셨다. 이따금 거친 비바람이 치는 때도 있었지만 봄날 같은 열 서너 해의 시절이었다.
우리 모자에게 생각지 못했던 시련이 찾아온 것은 불가사의한 일로 시작되었다. 주인내외가 결혼한지도 수십 년, 그분들의 나이 백세와 구십에 한 살 씩 빠졌던 해에 임신을 하고 일 년 후 아들을 낳아 이삭이라고 불렀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인데 주인내외에게는 웃음이었지만 우리 모자에게는 울음이었다. 이삭이 태어나므로 우리의 위상(位相)은 곤두박질쳤고 안주인의 기세는 등등해져 우리는 찬밥신세가 되었다. 안주인 사라가 우리를 대하는 눈초리는 ‘이제 너희들은 필요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우리도 몹시 불편했다. 하지만 그곳에 전혀 아는 이가 없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주인 아브라함을 믿었다. 모두가 우리를 몰라줘도 그분은 우리 편이라 생각했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그 귀한 아들의 돌잔치를 치르고 나서였다. 내 아들이 다 컸다고 해도 어린 아이였다. 그날 우리 아이가 이삭과 같이 있다가 그 아이를 울린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아이들끼리는 소통이 온전하지 못하니 큰 아이가 겁도 줄 수 있고 한두 번 쥐어박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안주인의 눈에 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리고 마땅치 않은데 귀한 그 아들이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어했다. 그 순간에는 얼굴을 붉히고 세모눈으로 째려보기만 했지만 뭔가 사단(事端)이 생기겠다는 느낌이 왔다. 안주인은 요구사항을 한 번 내밀면 관철될 때까지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는 성격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이튿날 아침 주인은 떡과 물 한 부대씩을 우리에게 건네며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시기만 빨랐을 뿐 예상한 것이어서 머리 숙여 그간 고마웠음을 표하고 말없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사정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았다. 그 결정 자체가 그분이 아닌 안주인에게서 나왔고 그분은 우리를 아끼고 있음을 말 안 해도 알기 때문이다. 우리를 떠나보내는 그 분의 눈빛도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너무 힘들면 내게 도움을 청하라는 그 분의 무언의 메시지도 나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으리라. 광야에서 굶어 죽어도 내 자존심이 그런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은 상황파악을 못해 아버지와 나 사이를 번갈아 살피다 나를 놓칠까 허둥지둥 좇아 나왔다. 갈 곳 없어 다다른 곳 브엘세바 광야. 목적지 없이 헤매다 이삼 일 만에 떡과 물은 바닥이 나고 힘 빠지고 맥 풀려 정신까지 혼미해 졌다. 철없는 어린 것은 집에 가자, 목마르다, 배고프다 칭얼거려도 방법 없는 어미도 괴로울 뿐이다. 아들을 키 작은 나무 덤불 아래에 두고, 나는 십여 걸음 건너편에 앉아 서러움에 신세한탄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눈은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로 가고 그 녀석은 육체적 고통에 아예 통곡을 한다. 어미 되어 자식 하나 돌보고 먹이지 못해 통곡 속에 숨지는 꼴 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이고 한스러웠다.
나는 의심스러웠다. 그 순간 내 귀에 똑똑히 들려온 소리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저 아이의 울음
을 들었다. 일어나 네 손으로 아이를 일으켜 세워라. 내가
그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헛소리를 들었다고 할 수가 없었다. 내용이 분명하고 너무나 생생해서 그 소리가 거듭 들리는듯했다. 갑자기 내 눈이 밝아지고 물이 있는 곳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는데 조금도 힘들지 않고 날아갈듯 몸이 가볍다. 한순간에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에게 말한 그분이 하나님이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알아지고 믿어졌다. 신기하다. 아들은 여전히 목이 쉰 채로 울고 있어도 이제는 염려도 안 되고 귀엽기만 하다. 몇 걸음 옮기지 않은 곳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이 있었다. 지난 며칠 여러 번 거듭해 돌아본 곳인데 그렇게 보이지 않던 샘물이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니 내가 이상해 보이는지 어리둥절해 한다.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샘물로 데려가니 눈빛이 확 달라진다. 왜 그러지 않으랴. 아이에게 내게 일어난 일을 들려주니 알겠단다. 자신도 이해가 되고 믿어진단다. 어찌된 일인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이제야 주인집에서 나온 것이 우리를 위해서 잘된 일이라는 게 믿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외적 상황은 변한 것이 없어도 이제는 마음이 편하고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다. 전에는 주인 아브라함이 우리 편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주인들이 원망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주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우리도 종의 가문으로 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문을 스스로 일으켜 세워 내 아들이 큰 민족의 시조(始祖)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자의 슬픈 통곡이 기쁜 찬양으로 변했고 그 분은 우리 삶의 인도자요 전능한 하나님, 우리의 의지할 이가 되셨다. 우리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오직 그 분과 그 분의 말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