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그리는 무늬
구름이 그리는 무늬
집으로 가는 길. 식을 줄 모르는 더위에 매미의 울음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더하니 눈길은 자연히 하늘로 간다. 하늘 한 쪽 동 편에 뭉게구름 피어올라 햇살 받은 윗부분이 빛나고 있다. 하늘의 많은 공간들이 푸른 채로 그 바닥을 드러내고 드문드문 흰 구름이 바다에 돛단배처럼 점점이 떠간다. 켜켜이 쌓인 하얀 구름이 언젠가 보았던 높은 산으로 오르는 설원의 쌓인 눈처럼 보인다. 생각이 그에 미치니 눈을 보는 심정이 되어 시원한 느낌이 살아서 온다. 자세히 하늘을 보니 얼음언덕도 있고 빙하도 보이고 눈 덮인 산으로 오르는 길도 희미하게 보인다.
동양의 하늘은 하늘의 뜻을 알리고 읽어내는 공간이었다. 낮에는 일식과 구름, 가뭄이 드러나고 밤에는 월식과 별들의 움직임, 혜성의 나타남이 있었다. 민중들과 지배자들의 시선은 땅보다 오히려 하늘에 머물고, 땅은 멀리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곤란했지만 하늘은 관심만 가지면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공간이었다.
하늘 바닥이 하얀 얼음조각들로 채워지기 시작하고 있다. 쏟아져 내리던 한낮의 햇살도 구름에 가리어 모습을 감추고 도로를 달구던 열기도 수그러들었다. 복잡한 땅을 잊고서 시원한 하늘을 보려하니 전선들과 건물에 가려 온전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시골이 나으리라. 하늘과 통하기 위해서는 시골로 가서 높은 산에 오름이 좋으리라. 어느덧 흰 구름이 빈틈없이 하늘을 덮었다. 한 여름에는 하늘을 덮는 구름도 반갑다. 올해는 가물어 이곳저곳서 아우성이니 빗소리가 아니라 구름만 보아도 반갑다.
집안에 들어오니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낮에도 텔레비전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쏟아내고 있고, 고요가 두려운 현대인들은 온몸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쓸어 담아 소화불량을 재촉하고 있다. 시원한 소식은 가뭄에 콩 나듯 하고 들려오는 소리마다 더위를 부추긴다. 온 국민을 상대로 나라의 공권력이 펼치는 코미디보다 더 웃게 만드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도리어 공권력을 걱정하고 연민의 눈으로 대한다. 한편은 나라와 그 안에 사는 스스로가 불안하여 서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소연할 곳도 찾지 못해 더욱 더위를 느낀다.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억제치 못하고 밖으로 나가도 덮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열린 공간을 찾아 산언덕으로 간다. 한여름의 불기운은 이성을 잃고 방향을 놓친 듯, 파에톤의 마차처럼 제동장치(制動裝置)도 없이 달려만 가고, 도처에서 탄식소리 슬프고 남 탓하는 비난소리 높기만 하다. 불만과 비난의 소리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 검은 구름 되는지 흰 구름 밀려나고 검은 구름 촘촘이 하늘을 채운다. 주변이 어둑해 지니 마음도 어수선 한데 어둠이 하늘을 덮고 땅을 가리자 여기저기 항거의 등불을 켠다.
하늘엔 별들 보이지 않고 비를 품은 바람만 허공을 휩쓸고 간다. 눈으로 검은 하늘 볼 수 없어도 나는 안다. 검은 구름들 함께 모여 평화로이 지내지 못해 밤새 치고받고 싸우며 눈물 쏟고 통곡할 것을. 의견들 밤새 엇갈려 모두가 씩씩대며 치고받아서 밤새 휭휭 바람이 불고 훌쩍거리며 비가 내렸다. 하늘 형편 모르는 호박꽃과 고춧잎은 새 힘을 얻고, 위로만 오르던 더운 공기는 다시 바닥에 가라앉았다. 때로는 싸움이 필요하다. 적절히 싸우면 문제가 풀리고 갈등이 해소된다.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고 듣게 된다. 비온 후에 땅이 굳어지고, 싸움 끝에 정이 든단다. 앙금이 풀리듯 먹구름들이 흩어지고 땅으로 비되어 쏟아져 내려, 여름날 동쪽 하늘 터지고 둥근 해가 솟을 때 신선한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고 논밭과 산의 풀들은 태양을 품은 자신들의 작은 또 다른 태양인 이슬방울을 자랑하느라 바쁘다.
새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새겨 나가듯 알 수 없는 하루를 출발하면서 우리 등에 금빛 햇살을 쏟아 붓는 아침 해와 푸른 하늘을 한번쯤은 보아두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구름은 하늘에 무늬를 그리고 날씨는 흐려졌다 개이기를 되풀이 하면서 궂은 날과 맑은 날이 번갈아 들어 계절은 오고 또 가고, 노인들은 하늘로 떠나고 청년들은 나이 들고 아기들은 이 땅으로 온다. 앞서 이 땅을 살았던 누군가는 산다는 것은 한 조각 흰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그 흰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 했다. 바람 불고 비 내린 숱한 세월에 헤아릴 수 없는 구름들이 일어나고 스러지고 모였다가 흩어져 갔다. 긴 세월 하늘은 흔적 없어도 개나리 나팔꽃이 피었다 지고 벌 나비 날아와 수많은 사랑얘기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웠다.
구름이 하늘에 무늬를 그릴 때, 우리는 이 땅에 사랑을 그린다. 얼마 못가 모두 사라질 이야기라도,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울고 웃으며 우리 앞 허공에 수놓아 간다. 땅에는 패랭이 들국화 피고, 사람들 싸우고 또 화해하고 사랑을 하고, 하늘하늘 고추잠자리 드높이 나는 하늘가엔, 오늘도 새로운 무늬 흰 구름이 그리며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