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내 남편(사래)
겁쟁이 내 남편(사래)
가나안땅에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타들어가고 짐승들 먹이인 풀들도 메말라 죽어간다. 많은 물이 흐르던 냇물들도 시뻘건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여기저기서 시끌시끌한 싸움 소리도 자주 들린다. 가뭄에 자연과 짐승들과 사람이 함께 거칠어져 가고 있다. 내 남편 아브람은 최근 들어 부쩍 걱정이 많아지고 이집트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자주 고민한다. 남편은 “결국 우리도 가야만 하나 이대로는 보름밖에 버틸 수 없는데….” 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침내 내가 있는 곳에서 조카 롯을 불러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 땅에서 어떻게 하든 버텨보려 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으니 나는 네 숙모와 내 소유를 이끌고 이집트로 가려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이야기를 했다. 롯은 간단히 큰아버지가 가면 자신도 가겠다고 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집트로 향했다.
낯선 곳을 가는 일은 언제나 긴장이 된다. 남편은 많은 이들을 책임져야 하니 더욱 어깨가 무거우리라. 이집트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이들과 얘기를 나누며 가끔씩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저들과 대화를 한다.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점차 달라지고 푸른 풀들이 자주 눈에 띈다.
남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내게로 온다. 쭈뼛쭈뼛하더니 어렵사리 말문을 연다. 내가 너무 미인이라서 걱정이 된단다.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는 죽이고 나는 살릴 것 같으니 그들 앞에서는 부부라고 하지 말고 오누이라고 하잔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목숨이 위태롭다는데 어쩌랴. 우리는 서로 오누이행세를 하기로 했다. 내 미모가 이런 사태를 초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이것도 만일을 대비한 우리의 추측일 뿐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없을 것이다.
이집트의 큰 도시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니 적잖이 부담스러운데 저들은 눈길을 거두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남편에게 여자는 누구며 당신과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 남편은 침착하게 오누이임을 밝힌다. 이것이 과연 바른 것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멀어져가고 우리는 갈 길을 재촉했다. 다음날도 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 나라의 고위관리로 보이는 이들이 가까이 오더니 이것저것을 묻고는 우리를 데리고 궁궐로 간다. 그곳에는 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왕도 나를 보는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로 남편에게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관계인지를 묻는다. 남편은 어제와 같이 오누이라고 말하자 왕은 바로 그러면 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관리들이 오히려 아무 거리낌이나 문제가 없다고 확인을 하고 나와 남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당혹 속에 남편을 보니 남편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다. 왕은 기쁜 얼굴이고 남편에게 처남이라 부르며 관계의 격을 높이고 노비들과 양과 소, 나귀와 낙타들을 선물로 준다. 얼마간의 흥겨운 얘기와 여흥이 있은 후 왕이 오늘 조금 피곤하다고 하니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왕이 먼저 남편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니 남편은 어쩔 줄 모르고 고관들과 함께 왕궁을 나선다. 나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더니 왕의 시종이 나를 안내해 한 곳에 가서 목욕을 하게하고 왕궁의 왕비들과 후궁들이 입을 듯한 옷들을 준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들이 진행된다. 여인들이 거쳐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정해져 있는지 여러 사람들이 차례로 나에게 와서 내 몸에 기름을 바르고 닦고 향수를 뿌리고 안마를 하고 왕을 모시는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분주히 오가며 자기들끼리 질투어린 눈으로 나를 째려보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한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지더니 왕의 시종이 와서 언제든지 왕이 부르면 왕의 침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란다.
무언가 갑자기 왕궁의 분위기가 급박하고 어수선하다. 왕궁의 의원들을 허둥지둥 찾고 많은 이들이 종종걸음으로 오고간다. 이 방 저 방으로 대야와 물수건을 가진 이들이 뛰어다니고 한꺼번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말이 들린다. 뭔가 심각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끙끙 앓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의원들은 복도를 오가며 갑자기 원인도 없이 저러니 방법이 있어야지 하며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왕의 시종이 나에게 오더니 왕과 왕의 가족들이 갑자기 심한 병이 낫는데 그 와중에도 왕이 나를 보기를 원하니 가보자고 한다. 왕의 침소에 가보니 왕은 펄펄 열이 나고 온몸에는 두드러기가 돋고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시종은 조금 전에는 호전되어 잠깐 정상상태였다고 했다. 왕은 갑자기 혼수상태에서 호통을 쳤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가 아내로 삼으려 한 그 여인을 후대(厚待)하여 그 사람 아브람에게 돌려보내라 그는 여인의 남편이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와 가족 모두가 죽으리라. 징표로 이제 너희 모두로부터 질병이 떠나고 깨끗해지리라. 그 순간 왕과 왕의 가족 모두가 열이 걷히고 두드러기가 사라지고 의식이 돌아와서 정상이 되었다. 의원들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며 자신들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했다. 왕은 나를 보더니 부들부들 떨며 자신이 한말이 모두 사실인지 물었다. 나도 모르게 힘이 솟고 당당해졌다. 모두가 사실이고 왕에게 말씀하신 분은 우리를 지키는 신이라고 했다. 왕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날이 밝는 대로 아브람과 이집트를 떠나라고 요청했다. 왕궁에 있는 이들은 사건의 전모를 모두가 자세히 알고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날이 밝자 왕은 곧바로 고위관리들과 남편을 불러들여서 지난밤의 일을 전하고 나와 남편을 후히 대우해서 이집트를 떠나가게 하라고 명했다. 남편은 죽었다가 살아난 표정이었고 하룻밤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우리는 이집트 고위관리들의 배웅을 받으며 왕에게서 받은 노비와 가축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그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