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내 어린 시절
아이, 내 어린 시절
지난 오월 초하루 노동절에 휴무인 곳이 많았을 것이다. 수필 반에서 금강 수목원으로 나들이를 갔었는데 오가는 중에 있었던 일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늘이 흐리고 간간히 비도 뿌렸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니어서 수목원의 한 부분을 산책하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한 곳을 가니 요즘 대세가 되다시피 한 황톳길이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400m라고 했다. 얼마쯤 걸어가니 한 분이 그 길은 맨발로 걸어야 제 멋이라며 신발과 양말을 벗자고 해서 무좀이 걸리고 발톱이 조금은 휘어서 어지간해서는 남 앞에 드러내지 않는 맨발로 그 황톳길을 걸었다. 남들은 발이 시원하다는데 나는 차가워 시릴 정도였다. 그 황톳길을 걷다보니 내리는 비 때문인지 바닥이 질척거리는 곳들이 있었다. 한 곳에 세 살 쯤이나 되었을까 하는 사내아이가 반바지를 입은 채로 천연스레 진흙에 주저앉아 놀고 있었다. 그 자연스러움에 진흙탕을 가장 잘 즐기고 있다고 한 마디씩 해주었다.
주변에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없어 혼자 떨어져 진흙놀이를 즐기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엄마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짧은 거리여서 잠시 후 아이를 다시 만났다. 그때까지 녀석은 그대로 있었다. 가면서 보던 때와는 달리 천연스러움이나 편안함이 없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를 보며 웃음 짓고 있는 육십 대 초반쯤의 아저씨가 있었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란다. 할아버지는 즐거워 웃고 있는데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는 것이 골이 난 것 같았다.
무언가 부모에게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아 함께 가지 않겠다고 시위를 하고 젊은 엄마 아빠는 할아버지를 믿고 떼어놓고 앞서 갔는가 싶었다. 돌아오면서 아이에 대한 얘기들을 한두 마디 하다 보니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그리로 가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뒤에는 그보다 훨씬 어린 아이를 캥거루처럼 가슴에 담고 아빠 같은 젊은이가 또 웃음 띤 얼굴로 가고 있었다. 노동절 휴일을 맞아 한 가족이 수목원으로 나들이를 나왔나 보다.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하고 첫날이 노동절이어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쉬고 얼마 가지 않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이어지고 성년의 날에 부부의 날이 모여 있어 특별히 가정을 생각하는 달이다. 어린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하는 가족을 보면서 손녀 생각도 나고 내 어렸던 시절을 돌이켜 보게 된다. 1960년대 초반이 내 어린 시절이다. 얼마 되지 않은 일들처럼 기억속에 남아 있는데 60여년이 흘러간 일들이다.
그 때에도 어린이날이 있었지만 그날은 내게는 집에서 혼자 쉬는 날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소파방정환 선생이 1923년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니 벌써 100여년이 넘었다. 내 어린 시절에도 당연하게 여겨졌으니 살만한 가정에서는 놀러가기도 하고 선물을 주었음직도 하다. 어디서건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던 내게는 학교를 하루 쉰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가난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겨운 시절이었으니 아이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을 게고 챙겨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놀았다. 집집이 자녀들이 적지 않았고 마을에 아이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놀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놀려면 함께 할 동무들이 필요하니 따돌림이란 말을 잘 몰랐다. 몇이 어울려 쏘다니고 몸을 부딪치며 노는 것이 일이었다. 집안 뿐 아니라 마당과 길바닥도 놀이터였고 산과 냇물도 모두 놀이 공간이었다. 밖에 으레 마을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곳이 정해져 있었고 그곳에 가면 짝이 맞지 않아 조금만 구경을 하다보면 또 다른 아이가 합류해서 두 아이가 서로 힘과 기술이 엇비슷하지 않아도 약한 팀에 더 강한 아이가 들어가는 식으로 함께 놀 수 있었다.
어린이 날이라고 선물을 받는 또래들이 드물었다. 서로 비교해 열등감을 느낄 일도 그다지 없었다. 그 하루를 어울려 놀고 싶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 않으면 되었다. 내게는 위로 두 형과 누이가 있었지만 나이 차이가 꽤 많아서 혼자 집안에서 잘 때를 제외하면 종일 나오는 스피커를 들으며 혼자 노는 것도 지루하지 않았다. 특별한 놀이도구나 읽을 책이 없었지만 혼자 넉넉히 놀 수 있었다. 혼자 놀기에 넉넉한 마당이 있고 때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팔다 데려다 놓은 강아지가 있어 함께 놀기도 했다. 내가 놀 만큼은 마련해 둔 구슬도 있고 혼자 놀면 그것들을 친구들에게 잃을 염려도 없었다.
부모와 때로는 나이 차이가 나는 형들이 나를 안쓰럽게 여겼을 것 같다. 정작 나 자신은 불행하다거나 가난하다고 크게 느끼지 않았다. 그런 것을 느낄 만큼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고 철이 나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처럼 학원을 다니거나 전자기기를 소유하는 일이 없었으니 기껏 차이가 난다고 해야 옷을 멀끔히 입는지 도시락을 제대로 싸오는지 정도였을 것이다.
가난은 나와 늘 친구로 지내고 싶은가 보다. 자녀로 부모 품에서 살았을 때뿐 아니라 내가 부모가 되어도 떠나지 않더니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어도 익숙하게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에는 가난하다고 그리 낙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주변에서 가끔 가난으로 힘을 내지 못하는 이들을 본다. 과거보다 빈부의 차이가 분명하고 눈에 띄게 드러나니 문제다.
이제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힘들어할 자녀가 없으니 다행이다. 나이 들면 다시 어린 아이처럼 된다하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난 그래도 꿈을 가지고 아이처럼 순수하게 살고 싶다. 질척이는 황톳길 속에서 놀다가 삐죽이던 아이를 보고 들었던 내 어릴 적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