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곳에서

밝은 곳에서

 

화장실이었다. 일을 마치고 눈을 들어 바라본 거울에 익숙하나 낯선 이가 있었다. 피부가 거칠고 주름이 진 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랬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모노레일에서 내게 자리를 권하던 중년의 사내를 이해할 수 있겠다. 혼자서 아직 늙지 않았다고 착각 속에 위안하고 있었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함께 나이 들어가니 모른 게다.

살아가는 현 시대가 착각을 부추긴다. 하나같이 제 나이를 인정하려 않고 젊어 보이려 버둥대고 있다. 주름을 펴고 허연 머리칼을 검게 하고 쳐진 눈꼬리를 끌어올린다. 어른의 옷을 입으려 않고 젊은이의 옷을 입고 젊게 보이려 한다. 우리 사는 곳이 어른이 우대받는 곳 아니었던가. 나이 들어 보이려 애썼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말은 비난이고 부끄러움 아니었던가? 한순간 내 사는 곳이 달라졌다.

왜 어른들이 어른임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무엇이 어른의 모습과 의복과 행동을 거부하게 하는 걸까. 어른이 되기 싫다는 게다. 어느 순간 우리 사는 곳에서 어른이 대우받는 존재가 아니라 천덕꾸러기가 되었다는 게다. 다른 누구보다 어른들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지혜보다 지식을, 경륜보다 능력을, 둥그런 조화보다 날카로운 개성을 원하는 사회가 되었나 보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고 더 건강해졌다. 나이는 들어도 몸도 마음도 크게 쇠락하지 않으니 자신을 노인으로 인정할 수 없는가 보다. 비록 손녀가 할아버지라 부르긴 하지만 다른 누군가 할아버지라 호칭하면 받아들이기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며칠 전에 어디선가 18~50세까지로 자격조건을 나이로 적어놓은 것을 보았다. 그 범위를 벗어난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건만 서운했다. 여러 곳의 후임자 자격기준이 55세 이하가 된 것이 오래 전이건만 원하지도 않고, 가능성이 없어도 그러한 광고에 마음이 서운하다.

그럼에도 노인의 옷을 입고 싶지는 않다. 아니 정장을 평상복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 논리에 맞지 않는 자가당착 같은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는 이제까지 타고난 성격이요 나다움이라고 강변해 왔다. 가만히 살피면 사회가 달라진 게다. 서서히 흐름이 바뀌어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어서 시대의 문화와 함께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온 게다.

내 부모세대만 해도 밤이면 한 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대소사를 함께하며 희로애락을 공유했다. 한 동네에서 결혼과 장례 같은 일들을 모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거주 형태가 변하고 일터와 거주지가 분리되면서 이웃의 결혼과 장례를 알기 어려워졌다. 그런 일들은 마을의 일이 아니라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의 일이 되고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어느 때부턴가 경로당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어른들이 그곳에 자주 출입하셨다. 이제는 문화센터와 평생교육원이 여기저기 개설되고 많은 노인들이 못다 이룬 꿈들을 그곳에서 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곳에서 무언가를 끝없이 가르치려 하는 게 불만이다. 평생 배우는 학생이긴 하지만 놓아주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해도 좋을 분들에게 누군가를 내세워 끝없이 가르친단 말인가? 배워야 하고 배우지 않으면 사회의 흐름에 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불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어디든 할 수 있으면 불의 밝기를 조금은 낮출 일이다. 병원과 도서관 같은 곳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을 보아서 좋을 것이 무언가? 용인해도 해롭지 않은 착각은 구태여 깨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 수 없는 것들을 아직 가능하다고 믿고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어떨까. 가끔은 한동안 책을 읽고 있으면 글자가 희미해지고 눈이 아프다. 그래도 한 시간에 예순 쪽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두지 않는다.

아침이면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도의 세면실에서 면도를 한다. 젊을 때보다 신진대사가 활발한 것도 아닌데 자주 털을 미는 이유를 가만히 찾아보니 하얗게 보이는 것들이 늘어나는데 있었다. 백색의 털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게다.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을 남에게는 더욱 노출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머지않은 시기에 그동안 배우다 놓아버린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다. 그것을 익혀 사용해보자는 의도가 아니라 전혀 가깝지 않은 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을, 조금씩 대면해 보려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그리스어일 수 있고 일본어일 수도 있다. 실용성보다는 그 속에서 가끔씩 혼자 깨닫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 배우러 멀리 갈 것 없이 혼자 집에서 책 한 권 펼쳐놓고 소리 내어 읽으며 망중한의 즐거움을 누리며 히죽히죽 웃고 싶다.

방송을 보며 나와는 점점 멀어지는 출연진을 보는 것보다, 외출하려 면도하며 더 늘어난 흰 털을 보는 것보다, 밝은 곳에서 자신의 늙어 감을 세세히 확인하는 것보다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유지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래들과 어울리며 늙는 것이 아니라고 자기최면에 빠지기도 싫고,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매달리는 내 자신도 보기에 딱할 것 같다. 조금 어둔 곳에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