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다들 어디로 가는가?

변두리1 2021. 10. 20. 22:12

다들 어디로 가는가?

 

조용하다. 어느 순간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학창시절 친구들을 주변에서 찾기 어렵다. 굳이 연락을 않던 동창회를 찾아내 알아보면 몇은 청주에 살고 있겠지만 개인적 사연과 친분이 없는 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자기 일에 바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겠지만 때로 외로움이 밀려오면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 곳곳에 흩어져 나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던 매미들의 그악스런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한여름 짜증을 부르던 그 소리가 이제는 그립고 듣고 싶다. 내년 여름에는 다시 그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힘들다고 할 테지만 지금은 그립고 듣고 싶다. 지나간 시간이 아쉬운 것인가? 그러고 보니 한동안 실솔실솔(蟋蟀蟋蟀) 울어대던 정겹던 소리도 사라졌다. 짧은 세월 온힘을 다해 울더니 모두 어딘가로 가버려 귀 기울여도 들을 수 없다.

내 어렸을 때에는 오종(午鐘)부는 소리가 들렸었다. 종이라기보다 사이렌이었는데 낮 열두시면 꽤 오랫동안 울렸다. 그뿐인가. 저녁 대여섯 시에는 국기 하강식이 전국적으로 동시에 행해져 모두가 멈춰 서서 반강제적으로 국기에 예의를 표해야 했었다. 날이 샐 즈음에 들려오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하던 노래도 어지간히 동네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태어난 후 줄곧 듣고 자랐을 그 소리들은 너무 익숙해져 반감을 갖기 어려웠다. 한 때는 민방공훈련을 한다고 끝까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여러 경보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전 국민을 공격해 생활을 통제하기도 했다. 정해진 날과 시간에 경보가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대피를 해야 했다. 학생시절에는 수업을 안 하는 공식적인 행사여서 모두가 정해진 곳으로 몰려가 방송을 듣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런 일들이 어떤 사고방식에서 무슨 목적으로 행해졌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리송하다.

세월이 흘러 개인 생활을 할 때에는 그런 시간에는 주로 집에 머물러 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어쩌다 밖에서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시간을 손해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때가 있었는지 조차 이제는 아스라해 가고 있다.

긴 세월 이 나라에 군림했던 통치자가 죽고 나서인지, 문민정부가 수립된 후부턴지 그러한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이제는 어떤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 자신의 시간이 있는가 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영원할 것 같던 일들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한없이 이어질 듯싶지만 그렇게 길지 않다. 세월 앞에 하나같이 겸손해야 할 이유다.

객관적 시간보다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시간은 편차가 더 크다. 온 국민이 하나였던 “2002 한일 월드컵이 근 20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지만 50년도 더 지난 과거다.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면 남들만큼 이 땅에서 산다고 해도 남은 날들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날들이 좋은 일들로만 채워진다고 할 수도 없다. 해결해야 할 삶의 과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고 그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게다.

매미소리가 사라진 것은 뜨겁던 여름이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고 귀뚜라미가 더 이상 울지 않는 건 가을이 깊어간다는 게다. 거리에 나뭇잎들이 노란빛을 띠어간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고 잎들이 근본 되는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옴이다. 주변의 어르신들이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하신다. 이 험한 세월에도 새 생명은 태어나고, 또 생을 다한 이들은 하늘로 떠나가신다. 내 앞에도 많은 분들이 계셨었는데 이제는 듬성듬성해 허전하다. 명절을 맞아 헤아려 보면 내 서열이 꽤나 올라가 있다.

여러 인연의 동기들이 현직에서 물러나고 있다. 세대교체를 당하지 않으려고 젊음과 힘이 있음을 보이려 무리들을 한다. 그런다한들 자녀들이 또 자녀들을 두고, 그들은 쉽게 하는 일들이 내게는 어렵기만 해 그들에게 부탁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뒤로 밀려나고 있음을 느낀다.

가덕으로 이어진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길을 가보았더니 절정을 이뤘던 때가 지나 곳곳에 꽃이 져 추레한 모습이 드러나고 냇가를 따라 무성했던 갈대들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잎들은 지기 전 단풍의 모습이 황홀하고 태양은 석양의 붉은 놀이 장엄하다. 마지막 축제를 벌이는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이 단풍을 찾아가고 일몰의 장관에 숙연해한다.

어느 날 돌아보니 매미소리 그치고 귀뚜라미 노래 사라졌듯이 그렇게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머물다 하늘에서 내 이름 부르는 날 홀연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들처럼 소리 들리지 않고 자취 보이지 않을 때에 이 땅을 떠난 것을 알고 그들을 그리워하듯 날 그리워 할 이들 얼마나 있으려나?

햇볕 따스하고 전망 좋은 오목한 곳에 볼록이 자리한 유택들을 보며 이 땅에서 한때 당당했을 이들이 이제는 흙속에 누워 찾아드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벌레들을 벗하며 때를 따라 피고 지는 꽃들과 함께 이 땅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본다. 성급한 은행잎들이 바람도 없는 이 시월 중순에 땅으로의 마지막 금빛 비행을 하고 있다. 이제 은행알들이 땅으로 찾아들고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그들을 덮어 침묵 속에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