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어디로 가는가?
다들 어디로 가는가?
조용하다. 어느 순간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학창시절 친구들을 주변에서 찾기 어렵다. 굳이 연락을 않던 동창회를 찾아내 알아보면 몇은 청주에 살고 있겠지만 개인적 사연과 친분이 없는 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자기 일에 바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겠지만 때로 외로움이 밀려오면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 곳곳에 흩어져 나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던 매미들의 그악스런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한여름 짜증을 부르던 그 소리가 이제는 그립고 듣고 싶다. 내년 여름에는 다시 그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힘들다고 할 테지만 지금은 그립고 듣고 싶다. 지나간 시간이 아쉬운 것인가? 그러고 보니 한동안 실솔실솔(蟋蟀蟋蟀) 울어대던 정겹던 소리도 사라졌다. 짧은 세월 온힘을 다해 울더니 모두 어딘가로 가버려 귀 기울여도 들을 수 없다.
내 어렸을 때에는 오종(午鐘)부는 소리가 들렸었다. 종이라기보다 사이렌이었는데 낮 열두시면 꽤 오랫동안 울렸다. 그뿐인가. 저녁 대여섯 시에는 국기 하강식이 전국적으로 동시에 행해져 모두가 멈춰 서서 반강제적으로 국기에 예의를 표해야 했었다. 날이 샐 즈음에 들려오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하던 노래도 어지간히 동네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태어난 후 줄곧 듣고 자랐을 그 소리들은 너무 익숙해져 반감을 갖기 어려웠다. 한 때는 민방공훈련을 한다고 끝까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여러 경보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전 국민을 공격해 생활을 통제하기도 했다. 정해진 날과 시간에 경보가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대피를 해야 했다. 학생시절에는 수업을 안 하는 공식적인 행사여서 모두가 정해진 곳으로 몰려가 방송을 듣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런 일들이 어떤 사고방식에서 무슨 목적으로 행해졌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리송하다.
세월이 흘러 개인 생활을 할 때에는 그런 시간에는 주로 집에 머물러 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어쩌다 밖에서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시간을 손해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때가 있었는지 조차 이제는 아스라해 가고 있다.
긴 세월 이 나라에 군림했던 통치자가 죽고 나서인지, 문민정부가 수립된 후부턴지 그러한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이제는 어떤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 자신의 시간이 있는가 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영원할 것 같던 일들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한없이 이어질 듯싶지만 그렇게 길지 않다. 세월 앞에 하나같이 겸손해야 할 이유다.
객관적 시간보다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시간은 편차가 더 크다. 온 국민이 하나였던 “2002 한일 월드컵”이 근 20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지만 50년도 더 지난 과거다.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면 남들만큼 이 땅에서 산다고 해도 남은 날들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날들이 좋은 일들로만 채워진다고 할 수도 없다. 해결해야 할 삶의 과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고 그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게다.
매미소리가 사라진 것은 뜨겁던 여름이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고 귀뚜라미가 더 이상 울지 않는 건 가을이 깊어간다는 게다. 거리에 나뭇잎들이 노란빛을 띠어간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고 잎들이 근본 되는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옴이다. 주변의 어르신들이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하신다. 이 험한 세월에도 새 생명은 태어나고, 또 생을 다한 이들은 하늘로 떠나가신다. 내 앞에도 많은 분들이 계셨었는데 이제는 듬성듬성해 허전하다. 명절을 맞아 헤아려 보면 내 서열이 꽤나 올라가 있다.
여러 인연의 동기들이 현직에서 물러나고 있다. 세대교체를 당하지 않으려고 젊음과 힘이 있음을 보이려 무리들을 한다. 그런다한들 자녀들이 또 자녀들을 두고, 그들은 쉽게 하는 일들이 내게는 어렵기만 해 그들에게 부탁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뒤로 밀려나고 있음을 느낀다.
가덕으로 이어진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길을 가보았더니 절정을 이뤘던 때가 지나 곳곳에 꽃이 져 추레한 모습이 드러나고 냇가를 따라 무성했던 갈대들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잎들은 지기 전 단풍의 모습이 황홀하고 태양은 석양의 붉은 놀이 장엄하다. 마지막 축제를 벌이는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이 단풍을 찾아가고 일몰의 장관에 숙연해한다.
어느 날 돌아보니 매미소리 그치고 귀뚜라미 노래 사라졌듯이 그렇게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머물다 하늘에서 내 이름 부르는 날 홀연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들처럼 소리 들리지 않고 자취 보이지 않을 때에 이 땅을 떠난 것을 알고 그들을 그리워하듯 날 그리워 할 이들 얼마나 있으려나?
햇볕 따스하고 전망 좋은 오목한 곳에 볼록이 자리한 유택들을 보며 이 땅에서 한때 당당했을 이들이 이제는 흙속에 누워 찾아드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벌레들을 벗하며 때를 따라 피고 지는 꽃들과 함께 이 땅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본다. 성급한 은행잎들이 바람도 없는 이 시월 중순에 땅으로의 마지막 금빛 비행을 하고 있다. 이제 은행알들이 땅으로 찾아들고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그들을 덮어 침묵 속에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