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대하여
상처에 대하여
거리를 걷다보면 유모차에 애완동물을 태우고 가는 이들을 가끔 봅니다. 개나 고양이에게 옷을 입혀 모시고 다닙니다. 애완동물을 향한 말투에서 그분들의 마음을 읽습니다. 으레 아기가 타고 있으려니 예상하고 옷까지 입고 있는 동물을 보고는 내심 깜짝 놀랍니다. 몇 년 전에는 동화 습작 모임에 참여했다가 강아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얘기들이 너무 많아 놀랐습니다. 이제 애완을 넘어 ‘반려’라고 합니다. ‘반려(伴侶)’는 ‘짝, 상대’라는 의미인데 그게 맞는 건지 내게는 당황스럽습니다.
얼마 전에 제목에 고양이가 포함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샀습니다. 택배요금이 있어 한 권은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아 두 권을 더 샀는데 공교롭게 모두 고양이가 제목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도착한 상자를 열어보니 고양이 간식과 첨가물이 곁들여 있었습니다. 고양이가 들어간 책을 구매하니 그것들을 좋아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많이 난처했습니다.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란했습니다. 그렇다고 길 고양이를 찾기는 끔찍이 싫고, 주변에 고양이에 관심 있는 이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쓰레기 처리를 하고 판매자에게 ‘요청한 것 외에 원치 않는 것을 보내 당황스러웠다’고 거칠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며칠이 지나 답글이 왔지만 확인도 안하고 삭제했습니다.
좋은 의도였겠지만 내게는 불편과 상처가 되었고 내 댓글은 또 그에게 꽤 상처가 되었을 겁니다. 모든 행동은 어떤 대상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좋지 않음의 강도가 클수록 상처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화를 분출하기도 하고 피해의식을 느끼기도 합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어쩌면 옷차림에 비례하지 않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관계가 깊지 않은 이들과 만날 때나, 의례적인 자리에는 정장 혹은 점잖은 옷을 입고 참여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서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나누기 때문에 상처받을 일이 별반 없습니다. 참여 자체가 일처럼 느껴져 재미도 없습니다. 웬만큼 가까워진 사이에는 굳이 격식을 차리지 않는 편한 옷을 입습니다. 크게 긴장하지 않고 서로에게 조금 깊은 이야기나 농담도 주고받습니다. 상처를 받고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때로는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결심도 합니다. 가족들과는 츄리닝이나 속옷 바람으로 몸단장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게 일상입니다. 대화에도 긴장감이 없고 즉흥적으로 주고받습니다. 때로 뼈있는 말, 가시 돋친 말들을 험하게 주고받으며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지나갈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시 만납니다. 부부는 맨살로 만나기도 하는 감출게 없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그러기에 가장 큰 상처를 주고받기 쉬운 사이입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건 그만큼 상대와 가깝고 긴밀한 관계라는 반증입니다.
가족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다 자신의 일에 바쁘고 집에 와서도 인사 한 마디 나누고 방에 들어가면 더 이상의 소통이 어렵습니다. 같이 있어도 혼자입니다. 사람이 같이 하지 않으니 개와 고양이를 그 자리에 두고 ‘짝’으로 격상시켜 위로받고 온갖 시중을 다 들어줍니다. 그들은 어쩌다 주인에게 신체적 상처를 줄 수는 있겠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혼자여서 외로울 때 다가와 곁에 있고 꼬리를 흔들며 몸을 부비고 위로해 줍니다. 반겨주고 기뻐하며 상대해 줍니다. 챙겨주지 않으면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불편을 고스란히 겪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감정을 공유합니다.
애완동물이 ‘반려’의 위치까지 오르고 온갖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하는 바탕에는 외로움과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사람과 나누어야 할 사랑과 배려가 동물에게로 향하고, 서로의 부주의로 주고받는 상처 때문에 개와 고양이에게 위로받는다는 게 서글픕니다. 세월이 흐르고 내게는 이런 친구와 지음(知音)이 있었다고 회상하는 것과 평생 몇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나와 함께 했다는 것은 같을 수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에게 사랑과 배려를 베푼다는 것도 인간중심사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도 어쩌면 ‘반려’로 방안에 들어와 사료를 먹고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 것보다 좀 더 자유롭게 자신들의 친구와 어울리고 스스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걸 행복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인간이 바꾸어 놓은 사회 환경이 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빼앗고 돌아갈 고향을 없앴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으로 외로워지고 그것을 애매한 그들에게 원치 않는 방법으로 해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집니다.
개와 고양이는 짐승이기에, 한 단계 상승해도 애완동물로 기르고,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긴밀한 관계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서로 조심하며, 가족 이웃 친지들과 사랑과 배려로 사는 게 현명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