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낮에 맞은 밤

변두리1 2021. 8. 17. 16:47

낮에 맞은 밤

 

 

팔월 초의 오후 네 시는 한낮이다. 햇살이 따가워 밖에 서있기 겁나고, 여덟시가 넘어도 어둡지 않다. 이런 불볕에 곡식과 과일이 익는가 보다.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에 구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하늘이 흐려지고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저녁 어둠이 깔리듯 세상이 캄캄해진다. 빗방울이 한둘, 앞 유리창에 맺히더니 강한 소나기가 되어 시야를 가린다.

두두 두두둑, 타타닥 타닥. 다다다 다닥, 차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하고 앞차의 모습이 흐릿하다. 도로 위는 어느덧 모를 심을 논처럼, 물이 흐르는 개울마냥 고인 물이 그득하고 쏟아지는 빗발에 정신이 산란하다. 주위가 어둡고 차선이 보이지 않는다. 웬만큼 거리를 두고 앞차만을 따라간다. 익숙한 길이라 다행이다. 캄캄한 밤, 길도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어깨와 다리에 어절 수 없이 힘이 들어가고 느린 속도도 빠르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야 내게 폐쇄공포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가끔 터널을 지날 때면 짧은 건 괜찮은데, 몇 분을 가야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다. 속에서 짜증이 솟다가 터널 끝이 보이면 진정되고, 햇빛이 비치고 사방이 확 트이면 편안해진다. 밤이 되면 불안이 더하다. 아주 익숙한 곳이 아니면 길을 자주 잃는다. 먼 곳을 갔다가 돌아올 때, 늦어져 밤이 되는 일이 가끔 생기는데,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이다. 주변이 컴컴하지만 낮에, 그것도 익숙한 곳이니 불안한 마음이 크지 않다. 안개가 떠가는 것을 본적이 있다. 지금은 마치 퍼붓는 빗줄기가 안개처럼 떠다닌다. 부옇게 무리지어 가는 것이 보인다. 긴 다리를 지난다. 비가 많이 내린다고 멈출 수 없으니 앞차를 따라 천천히 간다. 바람을 차단해줄만한 게 없으니 다리 위가 더 겁이 난다. 이 와중에도 몇 대는 빠르게 내 차를 추월해 질주한다.

다리를 건널 때쯤, 하늘이 번해지고 주위가 훤해온다. 하늘에 먹구름이 벗겨져 희고 푸른 공간이 보인다. 앞에 가는 차들이 또렷하고 차에 달린 여러 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불안이 씻은 듯 사라지고 길가 가로수가 빗속에 씻겨 산뜻한 모습으로 잎들을 흔든다.

문득 조상들은 갑자기 비가 내리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다. 집에 머물렀다면 한 순간 비설거지에 바빴으리라. 널어 논 빨래나 말리던 곡식 같은 것을 걷어 들이는 일이다. 논밭에서 일하다가는 원두막 같은 곳에라도 피했다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으면 마무리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집에 모인 이들은 모처럼 맞은 한가한 때를 즐겼을까? 비 피해를 걱정하며 근심스레 여기저기를 살폈으리라. 가뭄이 들어 고대하던 비였다면 환한 얼굴로 옷 젖는 줄도 모르고 삽과 호미를 들고 논밭으로 달려가 타들어가던 농작물을 흥에 겨워 돌보았을 게다.

내 아버지와 형들은 한 때, 곳곳의 장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장돌뱅이였었다. 땅이나 돈, 기술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던 시절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이들에게 비가 내려 장이 서지 않는 날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하늘이 원망스럽고 대책이 없었을 심정의 한부분이 내게 전해져 온다. 그런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으며 자식이 날씨와 무관하게 좀 더 낫게 살아갈 직업 갖기를 얼마나 바라셨을까? 오랜 세월이 흘러 부모님 마음의 한 끄트머리를 잡고 죄스런 생각에 젖는다. 살아계실 때 한 때라도,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목소리가 굵어지고 턱밑에 수염이 나듯, 정해진 때가 되어야 깨닫는 게 있는가 보다.

요란하게 퍼부은 빗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채 문으로 들어선다. 이게 좋은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사람도 생물인데 적당히 비를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어느덧 길가에 다시 햇살이 빛나고 은행나무에서 매미소리가 시원스레 들린다. 바깥과 달리 들어선 방안엔 시원스레 냉방기가 돌아가고 평온함이 그득히 고여 있다.

사람의 체온을 예사로 웃돌던 기온이 한동안 퍼부은 빗줄기로 내려갔는지 바깥 풍경도 제법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눈이 벽에 걸린 달력으로 가고 내일이 입추, 사흘 지나 말복, 보름 후면 처서를 맞으니 불볕더위와 한여름의 기세도 오래가지 못할 듯하다. 빗속에 심한 변화를 겪고도 다시 맞은 낮과 평온에, 나른함과 권태가 밀려온다.

오늘은 하루가 이틀 같다. 낮이 있고 낮 속에 밤을 살고 또 다시 낮을 맞고 머잖아 다시 밤이 오리라. 내가 보낸 빗속에 컴컴한 시간들을 불안과 걱정이 겹친 심리적 밤이라 할 수 있으려나? 인생이란 긴 세월 속에 이러한 밤들이 예고 없이 다가와 나를 성숙하게 하고 삶을 더 깊어지게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