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크림 빛 수국

변두리1 2021. 7. 28. 07:35

크림 빛 수국

 

답답하다. 언제나 끝날지 알 수 없는 거리두기가 오히려 더 강화될 모양이다. 거리두기가 없었던 시절에도 많은 이들과 만나진 않았지만 안 만나는 것과 못 만나는 것은 천지차이다. 무거운 무언가 마음에 얹혀있어 내려가지 않는 느낌이다. 장시간 쓰고 있어야 하는 마스크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차를 타고 잘 모르는 곳으로 달려간다. 며칠 전 아내가 시내버스와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고 다녀온 곳이다.

산속으로 이어지는 길,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너비다. 인간세계와 무관하게 푸르러가는 잎들을 본다. 깊은 산속 마을에 들러 한적한 곳에 앉아있으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햇살만 따갑고 눈부시다. 얼마 안 되는 곳에 교회종탑이 눈에 들어와 찾아가 보니 입구는 막히고 사람 키 높이로 잡풀이 우거져 있다. 마음이 더 답답한 게 좋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꽃가게에 들렀다. 오래전부터 아내가 사려고 별렀던 수국을 사기 위함이다. 몇 번을 그냥 지나치다 지난번에 가격을 물어보니 예상보다 비싸 사지 못했다. 이런 때는 마음에 드는 것을 카드로 사야한다. 현금을 주고 구입하면 돈의 크기가 금방 느껴지지만 카드는 무디고 애매해서 그 느낌이 바로 다가오지 않는다. 튼튼하고 꽃 색이 좋을 뿐 아니라 겨울나기도 쉽다니 몇 년은 소담한 꽃을 볼 수 있겠다.

아침에 보았던 계단 끝에 피어있던 백일홍이 생각난다. 요 며칠 불볕더위에 수분이 많이 부족했던지 꽃 바로 아래서 줄기가 꺾였다가 쏟아진 비에 힘을 얻고는 다시 하늘로 솟았다. 그 굽은 연약한 줄기로 무거워 보이는 꽃송이를 떠받치고 있다. 휘갈겨 쓴 자가 되어 꺾였던 흔적을 간직한 채 제 몫을 하고 있다. 풀꽃마저도 시련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살아있는 것들은 굳센 적응력으로 현실을 견뎌낸다.

새로 사온 풍성한 수국을 백일홍과 한 줄에 놓는다. 계단모퉁이가 한결 환하다. 역병이 물러가지 않아 여러 면에 불편을 겪는 갑갑한 마음이 잠시라도 꽃들을 보고 밝아지면 좋겠다. 수국이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내는 꽃들을 한 줄로 세우고 한 바탕 물을 주었으리라. 더위 속 단비처럼 물을 맞으며 꽃들도 싱싱함으로 답했을 게다.

두런두런 소리와 함께 새로 사온 수국이 어떠냐고 묻는 아내 목소리가 들리고 심드렁한 딸들 대꾸가 겹친다. 아내만 신이 나는가 보다. 방으로 들어와 말 하지 않아도 자녀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어린 시절에 자연 속에서, 감성을 기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짐처럼 남아있다. 생존에 급급해 좁은 시장 골목에서 유년의 세월을 몽땅 보내게 했으니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어쩌란 말인가?

하긴 자연 속에서 자란 내 자신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계절의 변화와 풀과 나무들이 보여주는 푸르고 아름다운 한살이가 눈에 들어와 마음에 담기기 시작한 것이 근년 들어서다. 이삼십 대 시절에도 자연은 여전했을 테지만 보아도 느끼지 못하고 마음에 울림이 없었다. 해결해야할 삶의 과제들이 시급했고 내 삶도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다. 힘 있고 건강하니 노년은 나와 관계가 없었다. 나를 향해 던지는 노인들의 좋은 때라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젠 젊다고 우길 수 없는 나이다. 풀과 나무들은 사철 모든 때가 좋아 보인다. 새 생명이 움터 푸른 싹이 나오는 봄의 신비, 녹음을 더하며 열매가 커가는 여름의 장엄함, 맛이 들고 붉고 노랗게 변하는 가을의 성숙함, 열매를 내주고 잎을 떨구고 새 생명을 위해 준비하는 겨울의 지혜를 헤아린다.

멀리 있는 풀밭이 더 푸르고 남의 가정이 더 행복해 보이지만 실제는 큰 차이가 없을 게다. 젊은이들은 노년의 안정과 달관이 좋아 보이고 노인들은 청년의 젊음과 패기가 부러우리라. 자신들의 불안과 방황, 노쇠와 현실에서 밀려남이 아쉬운 게다.

아름답게 활짝 핀 수국도 얼마가지 못해 찬 서리 내리고 서늘한 바람 불면 꽃이 떨어지고 추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할 게다. 그게 자연의 순리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년을 향한 씨앗이 맺히고 그 속에 또 한 해의 희망이 깃들게다. 수국이 던져주는 삶의 지혜를 배울 겸손함이 필요하다.

지금은 수국의 꽃을 즐길 시간이다. 이 여름 잎이 푸르러가고 열매가 튼실해지듯 내 삶도 풍성하기를 기대한다. 크림 빛 수국이여, 더욱 화사하게 소담한 꽃들을 활짝 피워 답답한 마음들을 시원케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