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나는 모르는데…

변두리1 2021. 6. 2. 22:20

나는 모르는데

 

 

최근에는 청문회를 자주 보지 않는다. 문민정부 시절의 뜨거웠던 청문회 기억이 있다. 광주특위청문회는 국가적 관심사였다. 증인들을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 자백을 받아내는 게 묘미였다. 장관이 되려면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이번 정부 들어 청문회통과는 의미가 없어졌다. 야당 청문위원이나 국민들은 증인들의 업무능력보다 도덕성에 더 민감한 것 같다. 후보자들이 국회에서 한 거짓말이 얼마안가 드러나곤 한다.

아내의 생일이었다. 저녁에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살림을 난 딸이 손녀를 데리고 왔다. 사위만 직장 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촛불을 하나만 꽂은 작은 케이크를 놓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렀다. 그때, 손녀가 조금은 곤란하다는 투로 나 이 노래 못하는데라고 말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조촐한 축하 후에는 딸들이 이튿날 아침으로 미역국을 끓인다고 시장을 봐왔다. 딸들과 함께 갔던 손녀에게 시장에서 무엇을 샀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난 잘 모르는데라는 답을 내놓았다. “~는데는 제 어미가 자주 사용하는 어투다.

모른다는 말을 사용하는 게 재밌다. 그날 사온 것들이 미역과 소고기였으니 아이가 기억하기는 무리였을 게다. 꽤 오래 전에는 사오 년 전 사진을 보여주고 엄마를 찾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사진에는 둘째가 사진을 찍느라 빠지고 없었다. 손녀는 한참을 보고도 찾아내지 못했다. 엄마가 함께 있는 사진에서는 금방 찾아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아니라 해도 비슷한 사람을 집어내지 않는 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이것이 아닐까 하는 걸 고르는 일이 얼마나 많고 자연스러운가? 모르는 것을 추측과 짐작으로 아는 것처럼 표현해 알고 모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구구셈처럼 간단하고 분명한 게 아니면 그런 현상은 더욱 힘을 얻는다. 우리 사회에 참보다 거짓의 목소리가 더 큰 게 아닌지 염려다. 분명한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강하게 발언하면 반박이 쉽지 않다.

간혹 TV 퀴즈프로그램을 본다. 대답할 기회를 얻고 문제를 맞히지 못하면 감점이다. 극적인 재미를 주려는 의도겠지만 한 문제에 순위가 요동친다. 모르면서 짐작으로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다른 아테네 사람들보다 지혜롭다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데 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모르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다.

우리는 언제부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손녀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은 특별히 정직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지적 수준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일게다. 청문회에서 보는 거짓말은 고도의 사고과정을 거쳐 나온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는 것도 복잡한 상황을 파악한 후에 나온 결론일 게다.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가능한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하나를 고르는 게 더 이익이다. 우리가 십 수 년 동안 받아온 교육의 결과다. 학생들을 가리켜 시험기계라고 한다. 시험에 잘 적응해 실력에 비해 점수를 잘 받는 방법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지선다형 혹은 오지선다형에 길들여져 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면 손해다. 몰라도 그럴듯한 답을 고르는 게 유리하다. 틀려도 감점이 없어서다. 곧 교육제도가 그렇게 만든 셈이다. 평가에서 짐작으로 답을 고르기보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할 수 있다면 어떨까? 잘못된 답에 감점을 하면 더 정확한 평가와 도덕교육이 동시에 되지 않으려나?

허세가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얼마가지 않아 편안해진다. 더 이상 과장할 일도 없고, 언제 어떻게 행동했던가에 대한 고민 없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라 할 청문회에 서는 이들의 도덕성 문제가 현 시대의 맹점은 아닐까? 그렇게 살아온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최고 지식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펼치는 부도덕의 현장을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 모습을 청산하기 위해 정직성의 회복이필요하다. 정직하면 서로 신뢰할 수 있고 삶의 바탕이 탄탄해진다. 서로의 말과 행동을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회인가. 생각만으로도 흐뭇하다. 손녀의 모른다는 말에서 너무 나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