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신과 인간
그리스의 신과 인간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요 여행 작가인 김덕영의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를 읽고 작은 해프닝을 겪고 내 생각을 <그리스의 신과 인간>으로 정리한다. 왜 뜬금없이 그리스의 신과 인간인가? 로마의 신들은 그리스신의 짝퉁들이다. 그러면 그리스 신을 말하자는 것은 뭔가. 아픈 사연이 있다. 책을 읽고 감상을 적은 두 편의 글을 실수로 삭제해 날려버려 대상을 모를 억울함과 상실감이 몰려온다. 다시 되돌릴 능력이 없고 내 실수로 인한 것이니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읽고 나면 곧 내용도 애매해지는데 다시 생각하려니 머리만 아프다.
뭉뚱그려서 다시 한 편의 글을 쓰고 있다. 그리스의 신들은 오늘의 종교에서 내세우는 신은 아니다. 신앙의 신이 전지전능이라고 한다면 그리스의 신들은 거리가 있다. 때로는 신들끼리 힘겨루기를 한다. 신들이 인간의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과 미움이다.
신들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제우스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제우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적인 욕망을 채운다. 마음에 들기만 하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관계를 맺고 자신의 씨를 퍼뜨린다. 부인이자 결혼의 신인 헤라가 감시 한다지만 걸려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제 버릇 개 못주고 그 일에 변신술을 능란하게 사용한다. 때로는 소가 되고 다른 사람이 되고 비가 되어 탑 안으로 들어도 간다. 그런 면에서는 인간들에게 뭐라 비난하기 민망할 게다. 다른 신들도 정도의 차이일 뿐 이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면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권력자에게 자신들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런 상대로 신을 능가할 존재가 없고 신중에는 제우스니 어떤 방법으로든 연결 지으려 하고 그런 일에 혈연관계보다 더 강력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사실은 그들의 필요에 제우스가 이용당한 것일 수 있다. 인간이 제우스에게 요청한다거나 신을 유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니 다소 억지스러워도 신화 속에 제우스가 나타나니 오히려 그가 피해자다.
그리스의 신들을 인간의 짝퉁이라 볼 수는 없을까? 크게 본 인간의 유형에 해당하는 신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인간의 대리전을 치른다. 유사 문제들이 생기면 신들 사건이 판단의 준거가 된다. 그 신들은 철저히 인간 사유의 창조물이다. 유형화되고 이상화된 신들 속에서 인간들은 안정을 찾는다. 그들은 죽지 않고 인간보다 뛰어나다. 그러니 인간 사회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다. 거대한 자연재해와 전쟁 같은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을 그들에게 미루는 게다. 그 방법이 축제요 제사다.
이 일을 전담하는 게 사제들이요, 신에게서 내려진 응답이 신탁이다. 신탁의 특징이 무엇인가? 모호성이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잘 모르다가 결과를 알고 나면 수수께끼처럼 확 풀리는 게다. 까다로운 문제의 최종해결이 신에게 있다. 인간은 두려움의 원인을 알려한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니 원인을 제거해야 두려움이 사라진다. 많은 재해의 원인이 신의 노여움에 있다. 그러면 신의 노여움이 풀리면 사건이 해결되는 게다.
그 일을 전담하는 사제가 힘을 갖는다. 문제의 원인과 그 해결법을 알고 있으니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리스 식 해결법에 많은 제약이 있다. 인간의 지성이 크게 발달하여 문제의 원인이 신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벼락이 제우스의 진노가 아니라 음전기와 양전기의 충돌임을, 많은 질병이 신의 저주가 아니라 바이러스와 세균이 원인임을 알고 있다. 원인이 달라지면 해결 방식도 달라진다. 이제 신전으로 병을 고치러 가지 않고 병원에서 의사에게 진찰과 처방을 받는다.
그리스 인들의 위대함은 생각하는 힘과 그것을 삶의 현장에 실현했다는 게다. 나라 전체가 신전이라 할 만큼 여러 곳에 신전을 세웠다. 그것도 돌을 깎아 대단한 규모로 세운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는 게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거대한 돌덩이들이 관광객을 맞는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 그 돌들에 닿았을 손길들을 생각한다. 신들이 지켜줄 걸 믿고 그 방식을 따르며 살아온 그들의 삶이 보인다.
그들에게서 민주주의가 꽃핀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은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게다. 가는 곳마다 자리 잡은 거대한 원형극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연설이 이루어지고 연극과 음악회와 운동경기가 행해졌다. 그 모든 것이 지역민들에게 문제를 던지고 함께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많은 인간과 그들의 행동 유형에 대한 전범이 있다는 것이며, 모든 과정을 거쳐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신전으로 나아가 해결할 수 있다. 사건 해결에 경우의 수 많다는 건 공동체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최악의 상황은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는 더 꼬이고 왜곡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데, 경우의 수가 많으면 여러 번 해결을 시도할 수 있다.
그리스의 신들과 선조들은 힘을 합쳐 후손들의 삶을 돕고 있다. 전 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끌어 모아 그리스 땅에 돈을 쓰게 한다. 인류에게 그리스와 그 신들은 친숙하다. 친숙함은 현대의 무기다.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노력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치열한가? 그들은 세계인의 신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