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진이를 부르는 이유

변두리1 2021. 4. 21. 18:08

진이를 부르는 이유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가 진이다. 화담 서경덕이 16세기 초중반의 인물이니 진이도 그 어간일 것이다. 450여 년 전 여인이 계속해서 영화로 드라마로 책으로 노래로 이 시대에 불려나오고 있다. 진이를 지속적으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우리에게 그녀가 필요한 게다. 창작자들은 소비자의 욕구에 민감하다.

황씨 성을 가진 진이를 통해 무엇을 보기 원하는 것인가? 비참의 끝에서 출발해 자유를 얻는 과정을 원하는 것일 게다. 가야금과 춤과 노래와 아름다움, 게다가 깊고 넓은 학문적 경지를 가졌으니 바로 원더우먼이다. 완벽한 영웅의 탄생을 통해 대리만족이라도 하자는 게다.

황진이가 오늘에 살아간다고 하면 세계적인 배우나 가수가 되었을 게다.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광적인 팬들이 모여들고 몇 년 치 일정이 잡히고 팔로어가 수백만에 달하는 영향력을 가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 게다. 시대를 잘못 만난 여인, 그럼에도 장벽을 뛰어넘어 자유인으로 산 인물이 황진이다. 신사임당이나 심청 춘향이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여인이 그녀가 아닌가 한다.

황진이는 출발부터 기구하다. 어머니는 송도의 눈먼 기생으로 가야금을 타는 현수였다. 그녀가 어느 날 운명처럼 만난 소리꾼과 인연을 맺어 황진이가 태어나지만 그 후로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나 별 다름이 없었다. 언젠가 두류산 계곡에서 선비들의 놀이에서 송도의 현수 눈먼 기생의 머리를 얻어주고 품었다는 이를 만나지만 부친인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녀는 한 서생이 자신을 사모하다 상사로 목숨을 잃고 상여가 자신의 집 앞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음에 저고리를 벗어주어 상여를 떠나보낸다. 자신은 잘 알지 못하나 그녀를 사모하다 한 남자가 죽었음을 알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녀는 서글픔 속에서도 선택받은 존재였다. 15세 전후에 관기로 나섰을 텐데 그 전까지 여성으로서 시대의 학문을 익힌다고 해야 무엇을 얼마나 습득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시대의 석학들과 시문을 논하고 주고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거문고나 춤과 노래도 내림이라 해도 상대가 없을 만큼 빼어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무언가 한 가지를 구비하지 않은 이와는 어울리지를 않는다. 기생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대단한 자존심이다. 어느 분야나 일인자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피곤한 일이다. 도전자들과 그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을 게다. 한량기가 있는 돈과 권력이 있다는 남정네들은 너나없이 한 번쯤 다가왔을 테니 더 없이 피곤한 일이었을 게다.

이언방과 이사종, 그들과 어울린 일화가 유명하다. 소리를 잘하는 그들, 모친이 부친과 만나던 순간같이 운명처럼 그들은 만나고 서로를 알아본다. 지음이랄까 서로의 반쪽인줄 알고 함께 어울려 한 때를 살아간다. 꽃이 피는지 낙엽이 쌓이는지 눈이 내리는지 모르고 세월은 가고 한없이 뜨거웠던 사이도 어느 순간 서서히 열기가 사라지고 남남으로 돌아선다.

송도의 삼절이라 불리던 박연폭포와 화담과 황진이, 자연물인 폭포야 감정이나 움직임이 없고 둘은 마음이 통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스승과 제자가 된다. 역사적으로 실학이 빛을 발하던 조선후기보다 음지에 속하는 조선중기에 그들이 있어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예속 속에 자유를 찾기 원했던 여인, 재색과 영특함이 우뚝했던 그녀도 세월을 넘어설 순 없었다. 말년 명산대천을 이생과 주유하는 장면은 서글프다. 가난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생활도 곤궁해지고 몸에 병이 나고 체력도 항상 강성할 수는 없다.

그녀의 모계로 삼대는 운명처럼 죽음이 참혹하다. 조모는 기생들의 우두머리인 행수였지만 예성강에 뛰어들어 물고기들의 밥이 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몰골로 발견된다. 어머니도 말년에 천포창에 걸려 어머니와 황진이의 재산까지 모두를 탕진하며 온갖 방법을 써보아도 차도 없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황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집안사람들에게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버려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살을 뜯어먹게 해 세상 여성들에게 경계가 되도록 하라고 부탁해 그렇게 했는데 한 남자가 시신을 수습해 장단 구정현 남쪽에 무덤을 썼다고 한다.

조선의 3대 천재시인이라는 백호 임제도 송도를 지나다 황진이 무덤가에서 시 한수를 짓고 술잔을 붓고 아쉬워했다. 그 후로도 그녀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수시로 그 삶이 세상에 공개되고 불려나오길 되풀이 한다. 굴종의 굴레에 저항하며 자유의 정신으로 한 시대를 살고자 했던 여인, 21세기를 살아도 전혀 부족하거나 주눅 들지 않을 여인이 황진이다.

 

이 글을 쓰는데 김탁환님의 , 황진이를 참고 했음을 밝힙니다. 작가의 치밀한 연구와 노고에 감사드리며 작가의 수고가 나 같은 독자에게는 즐거움이 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