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근원에 대한 사색

변두리1 2021. 1. 5. 15:35

근원에 대한 사색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추위 속 알싸한 대기가 나를 빼곡히 에워싼다. 내 몸 전체를 두르더니 그것도 부족한지 코를 통해 폐부까지 파고든다. 옷 속을 파고드는 한기를 피할 수가 없다. 그들의 저지를 무릅쓰고 물가로 내려간다. 주변 나무 아래에는 언제 내린 눈인지 희끗희끗 남아있다. 시내서는 눈이 온 걸 모르고 눈 구경을 못했는데, 호수에 오니 보란 듯이 버티고 있다.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데크길을 따라 걷는다.

호수에 분수 몇 개가 추위 속에 물을 뿜어내고 있다. 가까운 수면이 얼어있다. 녹색을 띠면서 허연 것들이 빙면(氷面)에 널려 있다. 아래를 감추고 굳어 있으니 추위 속 표정이 굳은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뿌려지는 물줄기에 찰랑거리는 수면이 보인다.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니 여유 있게 웃는 모습이다. 초가을에 보던 물결은 정감이 넘치더니 추위 속 호수는 허전하고 외롭다. 맵싸한 대기는 나를 더 가지 못하게 밀어낸다. 추위 속에 더러 호숫가를 걷는 이들이 보인다.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 겨울 추위에 왜 분수를 가동시켰을까? 햇빛 속에 뿌려지는 흰 물줄기가 쓸쓸하다. 반짝이는 호수의 물과 얼어붙은 수면이 대비되며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는 걸 생각한다. 기원 전 600여년 전후에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이들이 만물의 근원으로 신을 이야기할 때, 그는 의심했다는 것 아닌가? 다른 이들처럼 사고하기를 거부하고 무언가를 골똘히 궁구하기 시작한 것이 학문과 철학의 출발 아니었을까? 물이 뭐라 단정할 수 없는 물질이기는 했을 게다. 상황에 따라 형태를 바꿔 수증기도 되고 얼음도 되니 신기하고 물 없이 생명을 이어가기 어려우니 귀하게 느껴지기도 했겠다.

그의 뒤를 이어서 어떤 이들은 만물의 근원을 공기, , 흙이라 했다. 어찌 한 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리오? 기원 전 400년대에 이르면 엠페도클래스가 이 네 가지를 다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동양의 오행이 떠오른다. () () () () (), 만물의 근원으로 본 것 다섯 중 셋이 겹친다. 서로의 판단이 그리 다르지 않다. 물 불 흙, 얼마나 흔하고 접하기 쉬운 것들인가? 그것들이 근원이라니 신묘하다.

이 근원적인 것 가운데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이 무엇인가? 흙이다. 물과 불은 하루라도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불을 직접 대하지는 않는다 해도 가스불과 전깃불로도 보고 난로불도 접하지만 흙은 며칠을 대하지 않고 살아도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자주 사람은 흙 파먹고 사는 거라고 듣고 사람이 흙에서 왔다고 하는데도 흙과 멀어져 산다. 이것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내 어렸을 때에는 길이 흙이었고 밭에는 흙이 천지였다. 흙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자(漢字)에는 흙 토() 부수가 따로 있지 않은가. 그때에는 흔한 것이 흙이었는데, 방바닥도 들추면 흙이요, 멍석 밑도 흙이었다. 집 벽도 흙이고 부엌 바닥도 흙이요, 마당도 골목도 흙이었다.

몇 십 년 지나지 않았건만 흙을 밟거나 보기가 어렵다. , 밭은 멀고 집에도 길에도 흙이 없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도배가 되어 근원 중 하나를 접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삭막해졌다. 끝없이 재물이 나온다는 화수분이 땅이요 흙인데 인간이 그것에서 멀어졌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 흔하던 화수분을 온갖 포장으로 가둬놓고 생가라곤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활기 있게 오가지 않고 쇠로된 기계들이 굴러다닌다. 생기를 품은 흙은 덮여 질식하고 빗물도 스미지 않는 포장 위에서 우리가 산다.

호수에서 벗어나니 여기저기 허연 잔디가 눈에 들어온다. , 여름 푸르던 잔디가 이제 허옇게 탈색되어 있다. 페르세포네가 이 땅을 떠나 지하세계에서 하데스와 지내는 시기라 그런가 보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로 가는 곳 마다 생기를 주고 활력을 공급하더니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어미를 낙심과 탈진케 하다, 간신히 타협해 지상과 지하에서 시기를 나누어 살아간다. 이 땅에 온기와 생기가 돌려면 그녀가 돌아올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

봄이면 아지랑이와 함께 다시 돌아오는 생기를 만물의 근원인 공기라 한 것은 아닐까? 그 생기뿐 아니라 이 겨울에 밖에서 부딪히는 알싸한 대기, 어디선가 보았던 인간을 만든 질료로서의 먼지[dust]가 다 공기 아닐까. 색이 바래 희어진 잔디를 밟고 가다 파랗게 포장된 아스콘 길을 걷는다. 쉽게 변하지 않는 인조로 된 길을 가면서 허허로움을 느끼는 것은 무얼까? 마지막까지 나를 따라온 맵싸한 공기를 차문을 열고 들어가며 따돌린다. 그곳에는 아직도 식지 않은 온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호숫가를 훑으며 점점이 남아있는 눈들을 본다. 보이지 않는 불의 힘에 의지하여 생명의 힘을 묻어버린 아스팔트를 누르며 공기를 헤쳐 익숙한 내 서식지로 향한다. 내 집마저 만물의 근원들은 태초의 모습으로 날 맞아주지 않는다. 물은 인공의 수돗물이요, 불은 가스와 전기불이고, 흙은 조금뿐, 모두 질식 상태고 공기는 담과 창으로 갇혀 있다. 나도 근원에서 한참 벗어난 태초의 나는 아닌 게 분명하다. 돌아갈 수 없는 근원은 그리운 본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