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이런 성탄절이 올 줄이야

변두리1 2021. 1. 5. 15:34

이런 성탄절이 올 줄이야

 

성탄절 아침이다. 내 목회경험으로 가장 피곤해야 할 때인데 그렇지 않다. 세상이 사랑과 기대로 설레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며칠이나 캐롤이 울렸을까? 영 낯선 성탄풍경이다. 모두가 얼어붙고 조심스런 가운데 어찌할 줄 모른다. 성탄의 주체처럼 행동했던 가게들과 유흥업소도 조용하고 그들에게 밀렸던 교회들은 때 아니게 잠잠하다. 산타의 왕래도 눈에 띄지 않고 선물들이 오가는 것 같지 않다.

교회에는 성도들이 예배드리러 올 수 없다. 떠들썩하던 성탄절 전야의 거리도 한적했을 뿐이다. 불야성 같았던 유흥가의 불이 꺼지고 이 땅이 고요한 밤이 되었다. 아마도 처음 그리고 초창기의 성탄이 이러했을 게다. 이 유례없는 풍경을 거치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지나치게 오만하지 않았나를 반성하라는 것은 아닐까. 인류는 여러 번 질병의 습격을 받아 커다란 피해를 겪었다. 21세기를 살며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없을 듯이 의기양양해하며 전에 없는 풍요를 누리던 인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온 세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는 셈이다. 지구촌의 잔치랄 수 있는 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세계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명확히 확인한 게다. 우리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서 너무 벗어난 것은 아닌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한다. 르네상스를 맞으며 인간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신으로부터 떠나는 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온갖 지식들을 발견하는 보물찾기가 긴 세월동안 숨 가쁘게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영적인 일을 주관하는 종교인들은 점차 밀려나고 지식을 추구하는 지성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며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특히 과학자들의 숨겨진 지식 찾기에는 모두가 환호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선 흥미로운 여정이 이제 너무 먼 길을 달려와 떠나온 본거지가 아물아물 멀어 보일뿐이다. 이 지점에서 용감하게 선언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우리의 고향은 없다. 나는 내 삶의 주인, 단독자다. 나는 무신론자다. 너무도 무모하고 용감한, 몇몇에게는 멋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우리 삶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지는 않았는가. 인간의 이동속도는 걸음걸이가 보여주는 한 시간에 십리 정도가 정상이 아닐까? 인간의 이동속도는 동물을 이용한 시대를 지나 인공적인 불을 사용해 가공스레 빨라졌다. 자동차의 속도를 지나 고속철도를 넘어 비행기의 속도와 로켓의 속도까지 와 있다. 이동에만 속도가 붙은 것은 아니다. 생산 판매, 지식의 습득과 표현,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속도가 지배하고 있다. 오죽하면 선착순이라는 용어가 있고, 많은 영역에 그것이 주요수단이 되었을까.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자원을 소모하는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 를 지탱하는 주요원리가 사유재산과 자유로운 경쟁에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시장이다. 그 곳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균형이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원리는 수요와 공급을 통한 조절이다. 문제는 수요의 바탕이 인간의 욕망인데 이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편리와 쾌락에 한계는 없다. 기업은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고 이윤은 상품의 판매에 있으며 그것은 소비자의 요구에 얼마나 반응하느냐에 있다. 인류가 오랜 세월 살아갈 자원이 지구라는 공간에 존재한다면 수 억 년 보존해온 것들을 우리 세대가 단기간에 뽑아내 흥청망청 써버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경고 아닐까. 이 성탄의 아침에 성탄절을 최근처럼 지내는 게 온당한가하는 자성을 한다. 창조주와의 분리, 인간의 숙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 그에 대한 해결과 화해의 선물로서의 예수는 잊어버리고 산타와 캐롤과 연인들에 대한 사랑만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백화점과 유흥가의 주머니를 채우는 왜곡된 명절은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너무 종교적 시각이라고 하겠지만 근본이 그렇다는 게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건 아닐까? 헤롯도 왕위를 더 오래 누리기를 원해서 영아살해를 명했을 게다.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일정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을 맞는다는 게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수시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게다. 아이들 풍선을 생각하면 최대치를 이룬 직후에 파멸이 찾아온다. 그 순간까지 주변 인물들은 부추기기와 아첨을 쉬지 않는다. 그 일도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극성기에 이른다. 자신을 향한 칭찬과 인정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모여들 조짐이 보이면 멈출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 할 때, 그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랴.

지난날과 오늘, 교회의 과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이 과연 있을까? 어지럽다, 힘에 부친다고 느끼는 순간에 멈추는 것이 자신을 제어하는, 파멸로 가는 것을 막는 길이지 싶다. 자기체면과 집단세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움을 타개하는 지름길이요, 바이러스를 통해 인류가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불편한 성탄절 아침에 두서없이 늘어놓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