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선출기
회장 선출기
한 때는 회원이 많았던 모임이었다. 이제는 대여섯이 모이지만 매달 한두 번 모이니 적지 않은 정과 미련이 쌓였다. 어느 순간 회장을 정하기도 심드렁해져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평생하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모임이요 회장인데 그 분은 타의에 의해 독재자가 된 셈이다. 회장을 맡던 이가 십오 년을 청주에 살다가 얼마 전에 대구로 이사를 갔다.
이사 간 곳을 찾아가는 차안에서였다.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새로 회장을 뽑아야 하지 않겠냐고 운을 띄웠다. 회월 다섯 명이 차안에 다 있어 돌아가며 한 사람씩 후보를 추천하지고 했다. 네 사람의 의견이 한 사람에게 모아지니 만장일치가 되었다고 하니 당사자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늘어놓으며 넷 중에 한 사람을 추천했다. 지명당한 이는 그렇게 강요하면 모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성과 없이 원점이 되려는 찰나에 그러면 두 사람이 제비를 뽑자고 했다. 그 방법이 공평하지 않느냐며 내가 ‘회장 축하’와 ‘안 회장 축하’가 기록된 두 장의 제비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후보가 된 두 사람이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이왕에 제비를 뽑을 거면 다섯 사람이 모두 뽑아보자는 것이다. 확률 상 ½에서 ⅕로 줄어드니 해볼 만한 일이었다. 반면에 다른 세 명은 예상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일이었다. 뜻밖에 모두가 한번 해보잔다.
아무 글귀도 기록되지 않은 세 장의 제비를 더 접었다. 운전을 하던 이가 자신은 안 된다고 하니 누군가 한 마디로 걱정하지 말란다. 못할 사정이면 걸리지 않을 거란다. 제비 다섯 장을 넣고 나이 드신 분의 모자를 빌려 안에 네 명의 추천을 받았던 이가 제비들을 넣고 여러 번 흔들었다. 서로의 손으로 가리고 한 장씩 집어내고 나머지 한 장을 운전 중인 이의 제비로 정했다. 역시 운전자를 제외하고 동시에 펴보기로 했다.
평생직이 될 수도 있는 회장이 결정되는 순간, 명목은 모임의 대표지만 실제는 심부름꾼 역할이다. 내 제비를 펴본다. 아무 글자도 없다, 다행이다. “안 회장 축하는 뭐야?” 연세 많은 분이다. “아이, 이거 참” 네 사람의 추천을 받았던 이가 결국 회장 제비를 뽑았다. 본인이 제비들을 모자 속에 넣고 흔들고 제일 먼저 뽑았으니 할 말이 없다. 다른 네 사람은 기쁨과 축하의 박수를 오래도록 쳤다. 지극히 당연하고 신기한 결과였다.
이런저런 일로 일정잡기가 어렵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회장님 일정에 맞추라 한다.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지니 회장을 맡기로 했다. 직전 회장에게 선물을 하자고 하니 가다가 선물을 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세우라 한다. 회장직을 맡으니 일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금방 다르다. 비싸지 않아 마음만을 표현한 선물을 사고 영수증을 받는다. 직전 회장을 만나 새 회장을 선출했음을 알렸더니 누가 그 어려운 일을 맡았는지 궁금한가 보다. 간략하게 차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늦가을 오후가 길지 않아 집 가까이 있는 한 곳만 찾아보고 간 길을 되짚어 돌아왔다. 중간에 들렀던 휴게소에서 습관처럼 영수증을 챙기는 신임 회장의 행동을 보고 신뢰가 갔다. 필요에 따라 모일 때마다 회비를 거출해 사용하니 남고 모자람이 있다 해도 극히 미미하다. 우리는 재정에 대한 것은 회장에게 일임하고 감사를 하지 않기로 차안에서 결의했다. 부담스러운 것은 하나라도 제거하는 게 신임회장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새로운 체제로 갈 수 있을 게다. 아무래도 회원이 열 명이 넘으면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일처리에 분명한 원칙이 필요해진다. 그때쯤이면 모임에 인간적인 면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 이제까지 몇 개의 모임에 참여해 보았는데 언제 초기의 순수함이 사라졌던가? 대개는 회칙을 만드는 시기였지 않았나 싶다. 회원들끼리 개별성을 인정하면서 융통성을 보이던 모임이 회칙이 제정되면서 경직되어 간다.
회칙이 필요한 시기는 회원이 열 명 정도 안팎에 이르는 순간인 것 같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생물까지도 순환하는 주기가 있는 듯해서 긴 세월을 존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치 여러해살이풀처럼 겨울에 잎들을 떨구고 봄에 다시 살지 않는 한 주기는 대나무 마디같이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바라기는 우리 모임이 이제 세 번째 주기에 돌입했으면 하는 것이다. 다시 회원이 늘고 모두에게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떠난 방문길이 돌아오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밝은 햇살아래 보았던 단풍들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오늘의 여정은 새로운 회장을 당연하고 신기한 방법으로 선출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의미가 충분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그 사건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으며 커다랗게 웃었다. 새 회장이 된 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가족들과 나눌 것만 같은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