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첫 눈

변두리1 2020. 12. 21. 21:08

첫 눈

 

브라인드를 올리니 창밖에 조용히 눈이 내린다. 내 사는 고장에 내리는 올 해 첫눈이다. 바람이 없어 수직에 가까이 사붓이 온다. 눈발이 조금 더 굵으면 소담하련만 아쉽게도 세설(細雪)이다. 자리로 돌아와 늘 앉던 의자에서 가만히 밖을 응시한다. 내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니 가느다랗게 뿌려지는 눈이 검은 나무 둥치를 배경으로 내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나뭇가지에 하얗게 눈이 쌓였다. 내 방에서 보이는 밖의 풍경은 아파트 측면 벽이다. 약한 미색으로 칠해진 넓은 공간, 그 가운데에 가늘다고 해야 할 은행나무 두 그루가 하나처럼 붙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잎들이 모두 지고 뭉툭한 둥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는 가지들이 앙상하고 허술하게 붙어있다. 그게 또 절묘해서 밋밋하거나 압도적이지 않다.

옆방으로 가보았더니 풍경이 전혀 다르다. 아파트 동 사이로 조성된 숲 같은 모습이 보인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내가 이름을 모르는 꽤 많은 나무들이 가지들을 하늘로 뻗은 채 운치 있는 그림을 만들고 있다. 나는 늘 황송하다. 내 노력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철철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누리고 있고 그것을 또 남들이 몰라 한 마디도 내게 뭐라 하지 않으니 부담도 없다. 때맞춰 신록이 우거지고 꽃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공으로 누리는 혜택에 감사하다.

유리창이 나있는 곳에 푸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꽃 배추 몇 포기가 겨울 단색에 변화를 주고 있고, 세죽(細竹)들은 땅에 누운 채로 흰 눈을 이고 있다. 벌써 수 년 세월이 흘렀다고 훌쩍 키가 자란 조릿대는 내 눈높이 너머까지 흰 눈과 눈물처럼 눈 녹은 물을 댓잎에 지니고 있다.

내성적이며 소극적 성격 탓에 내 삶에서 눈과 겨울이 차지하는 의미는 작다. 계절마다 신나는 놀이들이 있건만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은 방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에 드는 구도자도 아니건만 위험이 두렵고, 어울리는데 익숙지 않아 혼자 지내다 보니 그게 생활이 되고 습관이 되었다. 이제와 마음에 끌림이 있어도 어쩌란 말인가. 너무도 먼 길을 그렇게 걸어온 것을. 내 삶에 스스로 만든 제약(制約)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들이 지금은 편해서다.

한 여름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오른다. 아이슬란드에 가서 차를 빌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폭설(暴雪)이 내린 모양이다. 산속으로 난 오솔길이 눈에 묻히고 차창으론 함박눈만 무섭게 쌓였다. 어딘지도 모르는 산속에서 밖으로 나가려 해도 차문이 열리지 않아 이렇게 북극 가까운 곳에서 죽나보다 했단다. 그 부분을 읽으며 고립감과 절망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자발적으로 나서는 일에 뒷걸음질을 치니 눈과 함께 떠오르는 일들은, 눈 속에 학교를 오가던 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시린 추억과, 소복이 눈 내린 길을 걸어 새벽 송을 돌던 성탄의 기억들, 더하여 나이 들어 눈길에서 겪은 아찔한 운전의 경험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눈이 내리면 나는 스스로 집안에 유폐된다. 살아오는 동안 방안에서 하는 일들로 익숙해진 책읽기와 공상(空想)의 세계로 든다. 이 소극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녀들은 눈구덩이 속에도 출근을 하고, 날 찾아오는 이들도 가끔은 있다. 어떤 날인가는 세상이 눈 속에 파묻혀 있다고 알고 있다가, 현실은 내 집 골목만 벗어나면 눈들이 말끔히 치워졌고 모든 활동이 정상적인 것을 보았다. 스스로의 우물에 혼자 갇혀 있었던 게다.

이러한 내 이야기들을 자주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풀어놓는다. 어느덧 습관이 들고 편해져 눈이 오면 나는 꼼짝하지 않고 실내에 갇힌 사람이니, 그리 알라는 은연중에 하는 자기 선언이다. 이런 사정으로 내게는 겨울이 사계절 중에 가장 길다. 이월 말에서 삼월 초 즈음이 되면 긴 겨울에 진력이 나서 어디쯤 봄이 오고 있는지 찾아나서는 게 최근의 버릇이다. 차를 타고 가까운 곳을 한 바퀴 돌아보며 푸른빛이 어디 보이지 않나 살핀다. 오는 봄을 맞으려면 남쪽으로 가야 하지만 그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청주 근교를 돌아보는 게 고작이다.

내 겨울은 천 눈이 내리는 날부터 가경천에 살구꽃이 필 때까지다. 오늘 눈이 내렸으니 내게는 이제 겨울시작이다. 밖에는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눈이 사선을 그으며 산발적으로 내리고 있다. 흐린 하늘에 스산한 날씨, 내 마음도 그러하다. 겨울을 즐기지 못하는 내 생활에 큰 변화를 주기는 어렵다. 한 겨울 텁텁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달려드는 알싸한 찬 공기에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 그처럼 내 내적 세계를 시원하게 해줄 어떤 책이나 대상을 이 겨울에 만날 수 있으려나 첫눈을 보며 새삼스레 기대를 한다.

구도자(求道者)들이 동안거에 들 듯, 이 겨울에 논어(論語)나 도덕경(道德經)에 사로잡혀 남들이 모를 나만의 세상에 침잠(沈潛)해 보고 싶은 욕심이 인다. 욕심을 버려야 도를 깨달을 수 있다 하거늘, 성인들의 가르침을 대하려 하면서도 그 욕심을 벗어나지 못하니 아직 멀었다.

아무튼 가벼운 염려와 함께 내 겨울이 시작되었다. 창밖에 첫눈이 소리 없이 내리며 겨울의 세계로 나를 데려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