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백일홍
붉은 백일홍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에 하얀 이라는 말이다. 어여쁜 여인을 칭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얼마나 강렬한 대조인가. 붉은 색과 흰색이 뚜렷하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호치(晧齒)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단순(丹脣)도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게다. 말을 잘해야 단순호치가 제대로 드러난다. 왜 아름다움을 여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한 사람의 전반적인 아름다움을 알려면 일생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백세시대라니 그걸 제대로 보기는 어렵겠다. 사람만 아름다운 건 아니다. 사랑을 가지고 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아침에 개수대 근처에서 조그만 달팽이 두 마리를 보았다. 그 얘기를 했더니 어제 깻잎을 씻었는데 거기서 나온 것 같단다. 멀리 가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것을 아내가 죽이려 해서 화단에 놓아주자고 했다. 흐린 눈으로 한참을 보고 있으니 작은 달팽이 모습이 사슴의 축소판이다. 이 땅에 와서 얼마 살지 못하고 우리에 의해 삶을 마감한다면 달팽이와 그를 만든 신에게 다 못할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많은 꽃들이 동그랗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 유심히 보니 꽃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동그란 형태였다. 꼭 구체(球體)가 아니더라도 타원과 원기둥, 원뿔의 형태였다. 크게는 태양과 지구가 둥글고 작게는 여러 알들과 씨들이 둥글지 않은가. 우리 몸에 있는 구멍들도 둥글다. 생명도 둥글고 그 근원도 둥글지 싶다. 내 주변에서 보는 백일홍 과꽃 박꽃 분꽃의 기본형이 하나같이 둥글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함이 사물의 본성인가 보다.
둥그렇게 가득하고 충족히 갖추고 살 수 있는 게 자연의 철리인 것을, 욕심이 지나쳐 한 부분이 불쑥 튀어나오고 다른 쪽은 움푹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다양하기는 하겠지. 모두가 동그랗기만 하면 무슨 볼거리가 있을까? “모두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이 아니라 개성들이 뚜렷하고 서로 달라 맞추어가며 찬란한 세상을 사는 게지. 진한 색만 예쁜 게 아니라 엷은 색도 은은한 맛이 있고 기품이 있다. 심지어 텅 빈 듯한 흰색이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크게 받아왔지 않은가.
눈 뜨고 문을 열면 나를 반겨주는 것이 있다. 유리문 너머에, 그리고 현관을 열면 눈앞에 보이는 백일홍이다. 그들은 몇 달 사이에 뿌려진 씨앗에서 싹이 나고 줄기와 잎이 생기고 꽃 피우고 씨앗 영글고 삶을 마감하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 백일홍은 여러 색깔의 꽃이 핀다. 빨강 분홍 주황 노랑 하얀색 꽃도 핀다. 그 중에도 빨강과 분홍이 내게는 가장 아름답다. 내게 그리움을 선사하려는지 분홍과 빨강 백일홍이 긴 세월 한자리에 활짝 피어 있다.
꽃들은 아름다움으로 의도와 다르게 생명을 재촉한다. 산과 들에 피어나는 야생화들을 꺾어오는 이들은 한 순간 꽃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을 사유(私有)하려는 욕망에서 꽃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모든 것을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우리에게 있다. 꽃들이 우리를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는다. 그들 종족을 긴 세월 이어가기 위해 빨갛게, 진하게 피어난다. 벌과 나비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 함이다.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본능일 것이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을 보면서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 현관문 앞에 피어있는 백일홍 한 포기에 진분홍 꽃이 한창인 것과, 절정을 지나 흐릿하게 시드는 꽃이 함께 달려 있다. 꽃들의 미래인 시든 꽃을 보며 애잔함을 느끼는 동시에, 생명을 이어주는 씨앗이 그 속에서 영글고 있음을 본다. 그 시드는 때가 양분을 자신을 위해 소모하지 않고 씨앗들에 쏟아 붓는 시기인가 싶다. 그렇다면 거룩한 희생의 모습이 시드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다. 꽃들의 일생에서 후줄근해 보이는 때가 건너뛸 수 없는 소중한 시기다. 때로는 꽃이 시들어 떨어져야 씨앗을 품은 열매들이 왕성하게 자라기도 한다. 모든 꽃송이들이 활짝 피어나는 순간들만 고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음 해에는 꽃들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를 게다.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거기에 있다. 왜 젊음이 지나가는 것을 부정하려 드는가? 젊음을 무한정 늘이려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젊음이 아니라도 충분히 의미 있고 순간순간이 아름다움을 왜 부정하려 하는가. 늙어갈수록 내면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 젊음의 2~30대가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는 때인지를 알면서 그리워한다. 외모가 아니라도 10대 청소년들은 얼마나 싱그러운가. 꽃피기 전 줄기에 힘이 들어가고 봉오리가 맺는 순간이 얼마나 빛나는가. 한 시절 전, 영유아기는 또 그대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생명 있는 존재들의 어린 시절은 귀여움으로 가득해서 호랑이도 새끼 때는 앙증맞다. 꽃씨를 뿌리고 싹이 나기를 기다리다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어찌 귀엽다 아니할까.
한창 귀여운 외손녀가 떠오른다. 모든 생명체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시기가 소중하다. 임신하여 어미의 태중에 있는 생명은 어떤가? 태동(胎動)에 부모는 희열을 느끼고 그 소중한 생명체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 출산이 임박한 남산만한 배 또한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어미는 출산의 두려움과 고통을 새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한다.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과거와 미래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현재를 즐길 줄 아는 혜안이 요구된다. 오늘도 유리문을 열고 동그랗고 붉은 백일홍을 본다. 그 속에서 꽃의 일생을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