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숨 결

변두리1 2020. 9. 17. 15:12

숨 결

 

촤르르르, 촤르르르.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 바다의 숨소리다. 여름휴가로 통영에 와서 자리에 누워 자장가처럼 파도소리를 듣는다. 바다가 기분이 좋은지 약한 숨소리를 내고 있다. 바다만 숨을 쉬는 게 아니라 만물이 숨을 쉰다. 아내가 옆에서 낮은 음으로 숨을 쉬며 잠에 빠졌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통영이 여름밤 후텁지근한 숨을 토해내고 있다.

낮에 기분 나쁜 듯 토해내던 거제 바다의 거친 숨결이 생각난다. 바다가 불만이니 해금강은 갈 수 없었다. 내가 탄 배가 바다의 살결을 긁어서인지 파도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배로 10분이면 가는 외도, 해금강은 가지 못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배를 탔다는 것이 중요하고, 배에서 바다를 봤다는 의미가 크다. 유일한 내륙의 땅, 충북을 웬만해선 벗어나지 않으니 내 삶에 기억할 만한 일이다. 해금강을 다녀오면 사오십 분 걸리는 모양이니 안 가는 게 오히려 멀미도 하지 않고 겁먹을 일 없으니 좋다.

나 혼자 구명조끼를 두 개나 들고 왕복 이십분 걸리는 배에 오른다. 이 때를 위해 샀고 만사 불여튼튼이다. 외지인이 많은지 배가 갑자기 내려가니 함성이 인다. 촌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놀란 척 하지 말아야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내색하지 않아도 내심 긴장이 된다. 흐린 채로 잔뜩 찌푸린 하늘이 골이 나 있는 것 같다. 화를 내듯 나를 거칠게 맞는다.

외도에서 보낸 한 시간하고 삼십분. 여름 축축한 땀을 흘리듯 줄줄 비가 내린다. 보타니아, 식물원이요 박물관이란다. 남쪽이라 그런지 열대식물들을 많이 가꾸어 놓았다. 이른바 스카이대를 나온 부부가 섬을 매입해 수십 년의 수고와 노력으로 일궈낸 작품이 보타니아다. 심겨진 풀과 나무들은 열대지방 어느 곳 같았고 조각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나게 하고 로마의 어느 곳에 있는 것 같았지만 내게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 이질적이었다. 비 내리는 팔월의 외도 보타니아는 더웠다.

돌아오는 배에서 본 바다의 숨결은 더 거칠었다. 가끔 본 방송에서 방파제를 거세게 때리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위협적이었다. 평소에 잘 느낄 수 없어도 인간은 모두 숨결을 가지고 있다. 화가 나거나 흥분하면 거칠어지는 호흡을 자제하기 어렵다. 평정을 유지하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폭발하면 겉으로 드러난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눈과는 다른가보다.

바람도 결이 있어서 비단결 같은 봄바람이 있고 더없이 거칠어 닥치는 대로 뽑아내고 무너뜨리는 거친 결을 가진 태풍이 있다. 바람이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면 마구 눈물을 뿌려대고 그로인한 피해도 적지 않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는 땅도 숨결이 있어 평소에는 풀과 나무와 곡식들을 얌전하게 내어주다가 화가 나면 갈라지기도 하고 내부에 있던 화() 덩어리를 쏟아내기도 한다.

살아있고 죽었다는 차이가 무엇일까? 호흡과 움직임의 유무인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나인가? 자동차가 제 기능을 발휘해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다면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삶을 마치면 폐기과정이 있다. 그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죽지 않은 것인가. 인간이 이 땅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백년 가까이 사는 것만 살아있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을 너머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순탄하게 사는 삶은 단조롭다. 역동성이 없는 잔잔한 삶은 별다른 긴장감도 함께 나눌 이야기도 없다. 그런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 해야 하나. 꼭 오디세우스처럼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며칠 밤을 이어갈 수 있는 인생이 제대로 산 삶일까? 내 삶이 평탄하고 단조로웠다면 자녀들의 삶은 파란만장하기를 바랄 수 있는 부모가 있으려나?

일상생활의 현장을 떠나면 좀 더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내 살아온 삶이 하찮고 비루해 보인다. 어쩌다 벌써 이렇게 긴 세월을 살아버린 것인가. 자녀 세대를 지나 손녀가 나타나니 내가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해도 어느덧 계단을 오르고 호불호에 대한 자신의 의사표현이 분명하다. 서로 만나고 어울리며 관계가 형성되고 밀고 당김이 생기니 호불호가 분명해진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맞이할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폭이 심하고 감정이 요동치며 삶이 흔들리는 역동적인 모습인가. 내 성격이 소심하니 그런 현실은 원하지 않고 감당하지도 못할 게다. 그냥 이제까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날이 그날인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그렇게 몇 십 년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존재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려서 읽었던 대단한 위인들처럼 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을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바다의 숨결은 차르르르, 차르르르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알 수 없는 소음들이 섞인다. 어제도, 몇 년, 수천, 수만 년 전에도 같은 음으로 비슷한 간격을 두고 바다는 숨을 쉬어 왔으리라. 그 많은 지나간 숨결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없듯이 세상사와 인류의 긴 역사의 한 부분을 살았다는 것밖에 무슨 의미를 내 삶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대단한 삶을 살다갔다는 이들이라 한들 한 때 역사의 물결을 휘정거려 놓았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으려나.

밝아올 날을 위해 잠을 자두어야겠다. 이 밤, 이 지붕아래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호흡이 안온하고 통영바다의 숨결도 얌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