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읽고
-악의 출발지로서의 인간의 기원-
유진은 출발부터가 악이다. 그는 어려서 그린 그림에서 악의 싹을 드러낸다. 이모는 언니에게 그것을 충고하지만 유진의 어머니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어쩌다 별 생각 없이 아이가 한 낙서하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캠프에서의 돌발행동과 퇴소를 통해 그 가능성은 짙어지고 바닷가에서 보낸 휴가에서 형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 어머니로서 빠져나갈 길을 차단한다. 의학적 진단결과 프리데터로 확인되고 어머니와 이모는 약으로서 그 광포한 힘을 억제하려 한다.
유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수영에 큰 흥미를 보인다. 엄마는 수영을 통하여 유진의 힘을 소모하고 그 기질을 유용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유진은 약을 먹지 않으면 오히려 힘이 더 강해지고 좋은 기록이 작성되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그 기분 좋은 상황을 맞이하려 혹은 그 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유진은 시기에 맞춰 약을 폐기하며 복용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통제가 어려운 그 순간이 두렵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하다.
유진은 도덕성과 연민을 느끼는 부분이 부족하다. 반면에 일반인보다 뛰어난 면이 있다. 수영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유망주였을 만큼 강인한 신체적 능력과 로스쿨에 합격할 정도의 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한 마디로 무서운 무기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병적인 편집증이 있다. 집주변 막차버스를 기다려 대상을 쫓아가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운전하면서 험한 말을 했던 여인을 우연히 만나고 그 여인이 막차를 이용하는 것을 알게 된다. 유진은 약을 복용하지 않은 채로 술을 마시고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거리로 나선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여인이 막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여인을 쫓아가 살해한다. 유진을 염려하여 미행하던 엄마는 그 광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유진에게 스스로 죽을 것을 요구하지만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만다.
언니와 늘 조카에게 관심을 갖고 관리를 하던 이모는 언니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자 신고를 해 경찰의 방문을 받는다. 유진은 엄마의 소지품에서 ‘일기 혹은 메모’라고 할 노트를 발견하고 그 기록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된다. 이모에 대해 쌓여 왔던 반감이 더욱 심화되고, 이모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유진의 집을 찾아온다. 이모가 전모를 알게 되다 유진은 이모마저 살해한다. 형 유민이 죽은 후 입양한 형을 닮은 해진이라는 또래의 아이가 있다. 그도 진실을 알게 되고 자수를 권유하지만 유진을 그럴 마음이 없다. 해진이 운전을 해서 경찰에게로 가던 중 유진은 공원 전망대를 들르자고 하고는 차를 물속에 빠뜨리고 어둠을 뚫고 탈출해 버린다. 모든 범죄의 혐의는 해진에게 씌워지고 유진은 행방불명되었다가 일 년간 새우 잡이 배를 탄 후에 다시 그 도시로 돌아온다.
유진은 자신과 관계된 이들을 살해했다. 그런 후에도 죄책감도 후회도 없다. 작가가 우리 사회와 독자들에게 힘껏 던진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 강력범죄들이 빈발하고 있다. 희생자가 가해자에게 그만한 해악을 끼친 일도 없고 심지어는 알지도 못한다. 불안하다. 가해자가 의지적 선택으로 범죄를 저지르면 차라리 그렇게 불안하지 않다. 질병으로 나아가 태생적 문제로 본다면 더욱 불안하고 심각하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이며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유진은 자신의 상황을 모른다고 하자. 어머니로서 혹은 보호자로서 그를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인가? 돌아다니는 흉기를 방치할 것인가,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이라면 그를 감금해야 하나? 그 상태를 질병이라고 하면 그에게는 또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인가. 유진은 그 상태가 파악된 것이라고 하면 파악도 되지 않은 채로 활보하는 이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힘겹고 하루를 무사히 산 것에 안도하는 것으로 족한 것인가?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악의 기원’이라고 하면 더 적확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작가는 ‘종의 기원’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심지어 그 제목으로는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작품이 있는 데도 말이다. 작가의 말을 통하여 인류는 살인을 통해 진화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을 좀 더 일상화하면 인류는 전쟁을 통하여 혹은 사냥을 통하여 진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애매하게 말하면 적자생존(適者生存), 곧 이긴 자가 살아남았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종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내부에 유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극도의 잔인성과 악의 성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서로가 조심해서 발톱을 드러낼 일을 만들지 말자는 말인가. 항상 상대의 발톱에 유의하라는 것인가.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문제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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