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사람들

늘 미안한 마음으로 맏딸에게

변두리1 2016. 7. 29. 13:44

늘 미안한 마음으로 맏딸에게

 

   무슨 얘기부터 하는 게 좋을까.

벌써 오래 전 일이네. 네가 수학여행을 가던 고1 때 일로, 너와 나 모두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일일 거야. 친구들은 거의 다 휴대폰을 갖고 있었지만 너는 없었잖아. 그것을 사줄 가정형편도 아니었고.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전화와 문자 외에는 별다른 기능도 없는 것을 허락도 없이 여행에 가져가고 싶었을까. 그걸 그냥 넘기지 못하고 출발 직전의 버스에 올라 빼앗아온 아빠를 너는 또 어떻게 생각했을까.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고, 무능한 아빠가 밉고, 복잡한 심정이었겠지. 왜 그때는 네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그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예민한 중고등학생 시절을 우리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잖아. 햇빛 안 들고, 난방 허술하고, 샤워도 불편한 곳에 살면서, 불편하고 자존심도 지키기 어려웠을 거야. 가족이 다 힘들었지만 성격상 네가 제일 고통스러웠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좁은 시장 골목에서 십대 후반까지 추억할 만한 것 없이 지내게 한 것을 어찌 미안하다는 한 두 마디 말로 다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 시절에 너는 학교를 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 다른 집 아이 일이면 인생이 길으니 한 두 해 방황해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딸의 일이 되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 아닌 다른 대안을 찾을 자신이 내게 없었어.

   대학 입시 첫해에 아빠, 두 군데 다 발표 났는데 제 이름이 없어요.”라고 할 때는 네가 안됐기도 하고, 내 자신도 막막했었다. 쉽지 않은 재수시절, 학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힘겹게 홀로 이겨내고도, 자신의 의지를 꺾고 동생들을 위해 학비가 적게 드는 곳을 가야하는 네가 안쓰러웠어. 그 후로 언젠가 네가 공부했던 책들을 보고 학습량이 정말 많았던 것에 놀랐어. 걱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충분히 알아서 하는 것을, 너무 모르고 믿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었지.

   얼마 전에 새 직장을 구하면서 차가 있어야 하겠다고 하더니, 십 년도 넘은 차를 구입하고는 그렇게 좋아했잖아. 그때도 내 마음이 아팠어. 너야 처음 차는, 중고차가 좋대요.”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새 차를 사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아니까, 오래 전 핸드폰 생각이 자꾸 살아나는 거야. 그 차를 우리 가족이찬찬이라고 부르잖아. 너의 저돌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하라는 거지.

   나이 들면서 알았겠지만 아빠가 경제적으로 많이 무능하잖아. 게다가 자상하지도 못하고, 다른 가족들처럼 나들이나 외식도 하지 않았으니 서운했을지 몰라.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전혀 익숙하지 못해서였어. 성격이라도 개방적이면 나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모두가 고생을 한 거지.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왜 그리 미안한 일들이 많을까.

그동안 가족 전체의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 지난번에 관광지 몇 군데를 함께 갔었지. 어느덧 계획세우고, 사진 찍고, 무엇을 할까까지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더라고. 셋 다 직장인이 되었고, 있는 곳에서 주도적으로 일들을 하겠지. 믿음직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

   

  앞으로 우리가족이 다 같이 함께 할 수 있는 세월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지금도 모두 일이 바쁘니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네. 이제부터라도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야지. 지난번에 온 가족이 미술전시회에 가고 연극도 봤잖아. 그런 것도 좋은 것 같아.

   댓잎들이 짙은 녹색으로 돋아나고, 바닥을 따라 뻗어가는 호박잎들의 기세가 놀라워. 곧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 오겠지.

   늘 건강하게, 직장인으로 또 대학생으로 의미 있는 삶을 열심히 살기 바라며.

                                                                                    2016. 6. 10.

                                                                                                                           미안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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