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어머니
어머니는 자주 신세 한탄을 하셨다. 열한명의 자녀를 낳아서 네 명을 기르셨다. 젊어서 화병이 걸려서 그 병을 다스리느라 담배와 술을 배우셨다고 했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끔 다투시고 혼자 소리 내어 우셨다. 어린 마음에도 슬펐다. 많은 일들이 가난 때문이었을 것 같다. 자식들은 커가고 있고 돈 들어 갈 곳은 많은데 집안 형편은 뻔하고 미래조차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얼마나 무력하고 답답하셨을까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
어느 날인가는 자다가 깨어 보니 가족들이 아무도 없어서 엄마를 부르며 오래도록 울었다. 그 날 어머니는 취로사업을 하시고 밀가루 한포를 받아 오셨다. 어떤 때는 나물죽을 쑤어서 자식들에게는 나물을 주고 부모님들은 뜨거운 국물만 드시곤 하셨다. 날이 밝아도 별로 할 일도 없고 일어나면 추우니 늦게까지 가족들이 이불속에 누워 있곤 했다. 다른 계절도 어려웠겠지만 한겨울에 어머니가 겪었을 난처함과 애처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불기 없는 새벽, 물도 얼어붙는 추위에 양식 없는 부엌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머니는 언제부턴지 동생네 집에 허드렛일을 하러 다녔다. 내게 이모가 되는 그 집은 동네에서 큰 가게를 했다. 전에는 다른 사람을 품삯을 주고 썼던 것을 이모가 우리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굶지는 말아야지 하는 배려에서 언니에게 부탁을 했으리라. 어머니도 전혀 거절할 형편이 못되었고 자식들을 먹여야 했으니 고마움으로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그곳에 가셔서 종일 단순한 일 하시다가 밤늦게 음식을 가지고 집에 오셨다. 세월이 흐르면서 요령을 익히셔서 어머니는 저녁을 여유 있게 하고 이모도 알고 인정했던 듯하다. 어렸던 나도 엄마가 계시니 빈번히 가고 그럴 때면 엄마는 맛있는 것을 주곤 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더 자주 오기를 바라셨을 지도 모른다. 이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니의 월급을 예전 사람들과 비슷하게 주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라고 자식들의 성장에 따른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내 위로 형들과 누이는 원하는 만큼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본인들의 갈등과 부모님들의 아픈 마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같이 야간학교에 진학하여 주경야독을 꿈꾸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 두 아들은 재입대한 군 생활과 잦은 가출과 방황으로 딸은 결혼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찌 보면 모두가 스스로 살길을 찾기 위한 힘겨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려서 그 일들의 심각성을 모르고 지나왔으니 그것을 다행이라 할 수도 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주전부리를 파는 일도 한동안 하셨다. 평생을 가난하게 사셔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일이 힘에 겹더라도 주위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고 하셨다. 어머니라고 왜 편하고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런 삶의 일차적 조건이 경제적 안정이라고 생각하셨으리라. 어머니는 자주 몸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 험한 세월에 자식을 열 하나를 낳으시고 험한 일들을 치루고 어떻게 온전하실 수 있을까. 그래도 병원에 가보시라 하면 의사들은 다 허가 난 도둑들이라 하셨다. 이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약을 드셔도 하루 이틀에 완치될 병들이 아니었고 병원의 일정대로 치료받기가 부담스러워 그때마다 참고 넘기다 보니 아픈 곳이 많아 지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몇 년간을 막내인 나와 같이 사셨다. 그때가 어머니 생전에 가장 한가하셨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그 시기에도 틈만 나면 나물이라도 뜯으러 가셨다. 한가한 것이 불안하셨을지 모른다.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항상 쌀과 연탄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월동대비였던 것이다.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전화만 하면 금방 가져다주는 것을 왜 그토록 채근하시나 했다. 어머니께는 그것이 긴 세월 두려움이자 압박이었고 절실한 필요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가정에 아들이 있기를 바라셨다. 건강이 악화되시면서 못내 그 일을 아쉬워하셨지만 그것은 누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병이 깊어 지셔서 형님 댁으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임종을 하셨다.
어머니는 한과 집착과 설움이 많으셨다. 자녀들을 향한 미안함과 아쉬움도 많으셨을 것이고 자식들도 어머니를 향한 죄송함과 고마움이 너무도 많다. 가족에게 마음을 다 쏟으시고 좋은 것 한번 누려보지 못하신 어머니, 세월이 험했다는 말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부모님 두 분 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어려운 삶만을 사셨고 풍요롭고 편안한 시절은 한 번도 누리지 못하셨으니 너무도 마음 아프다. 오늘의 나는 어머니께 칠 할은 영향을 받았고 빚지고 있다. 미덥지 못한 막내, 서운했던 생각들에 눈감기도 아쉬우셨을 어머니. 끝까지 효도 한 번 해드리지 못하고 맘 편히 해드리지 못 한 것이 마음에 늘 남아 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 가족을 굽어보시고 잘되기를 바라실 것만 같다. 어머니를 회상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
'변두리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모님 팔순에 (0) | 2014.07.07 |
---|---|
씩씩한 장모님 (0) | 2014.06.25 |
아버지에 대한 이해 (0) | 2014.06.20 |
운명이라 해야 하나. (0) | 2014.06.15 |
아버지 같은 형 (0) | 2014.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