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라는 한동일 박사가 서강대에서 했던 강의를 옮겨놓았다고 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더구나 성공은 또 무엇일까? 학교 때 공부를 단거리 경기라고 하면 인생의 공부는 장거리 경주다. 공부를 습관이라고 하는 그의 표현이 실감난다. 잘 되는 때도 있고 잘 되지 않는 순간이 있는 것이 공부다. 학업의 성과를 한 줄로 세우는 것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지만 우리 실정을 부인하기 어렵다. 부모나 학생은 항상 성적이 상승하기를 원하지만 항상 오를 수만은 없다. 비교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고 스스로 평가해 부끄러움이 없으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평가해 부끄러움이 없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늘 듣는 말이 타인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하라 하지만 꼭 그럴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다그치는 걸 옳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무조건 너그러운 것이나 칭찬을 위해 일부러 사실을 찾아내는 건 문제가 있지만 오랫동안 애쓰고 수고한 일들이 왜 없을까? 내 경우에는 성과가 없고 지지부진해도 뭔가를 늘 하려하고 용기를 잃지 않은 것에는 너그러워도 괜찮을 일이 아닌가 한다.
우리 삶에 위대한 유치함은 또 얼마나 많을까.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과정이 꼭 대단해야만 하나. 어떤 것을 선택하는 동기가 대의명분이 분명하고 떳떳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첫눈에 좋아 보이고 즐거울 것 같다는 것도 괜찮은 동기이고, 뭔가 마음이 끌리는 것 같은 것도 좋은 것 아닌가? 초·중등학교 시절을 돌아보아도 친구를 선택하는데 대단한 게 있었다기보다 착해 보이고 마음이 끌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는 척 해보고 싶고, 고상해 보이고 싶은 것이 얼마나 그럴 듯한 동기인가. 옷을 사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멋있어 보이려고 아닐까?
내 하는 일이어서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교회에 첫발을 딛는다. 어떤 세계로 사람을 이끄는 것은 강력한 유혹성이 있으면 족하다. 비록 얼마 하다가 중지하면 어떤가. 그만큼 가본 것이 득이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은 언젠가 다시 그 길로 접근하게 만들지 모른다. 끝까지 가지 않을 길은 일찍 가다가 돌아오는 것이 낫다. 한 번 실수가 성공으로 가는 여정인 경우도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되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기도 하다.
긴 인생길에서 때로는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쉽사리 판단할 일이 아니다. 신체적 조건이 좋은 것이나,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을 장점이라고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너무 쉽게 남의 눈에 띄어서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 재주가 없어 보이는 것이 때로는 오래 살아남고 자기 일에만 매진 할 수 있는 장점이라 할 수는 없을까?
공부하는 노동자라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공부를 신성하고 귀한 것으로 안 것 같다. 한자 학(學)을 어떤 이는 아이가 공부하는 학교를 그렸다고도 하고, 누구는 아이가 두 손으로 새끼 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 한다. 내 느낌으로는 책상 앞에 아이가 앉아있는 것 같다. 긴 시간 앉아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야말로 노동이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습관적인 노동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늘 쓰던 말에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가 있다. 주고받는 것이든, 주고 빼앗는 것이든, 서로 간에 비슷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지켜지지 않으면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 일방적인 사이는 한두 번을 넘기지 못한다. 한쪽이 피해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리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해도 만만치 않다. 하나를 받으려면 적어도 나도 하나를 주어야 한다. 그것도 상대가 필요로 하는 유익한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줄 수 있는 것은 독특함이 없다. 꼭 필요한 관계로 남기 위해서는 남이 줄 수 없는 자신만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죽음 앞에 초연하기는 어렵다. 로마의 어느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져 있다는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구절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선명하면서도 섬뜩한 말인가.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빈부에 따라 조금 앞서고 뒤설 수 있고 고통을 덜 수는 있을지 몰라도 누구도 피해 갈 수는 없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이들이 이 땅에 미련이 더 남을 수도 있다. 누가 자신이 산 이 땅에서의 삶을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까? 미련이 없다 할 이가 없으리라.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이 인생이고 그렇게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기에 남은 이들이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 서는 두려움, 이것을 넘어선 이들이 신앙인들이다. 이성과 과학을 넘어서는 곳에 신앙의 위대함이 있고 그 힘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게 한다. 그 궁극의 공포를 넘어서라.
우리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은 유한하고 마침내 지나가게 되어 있다. 어느 것도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내 것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이 순환하고 흘러가고, 영원을 살 것 같던 삶이 어느 순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내가 했던 것들이 마침내 잊혀지고 끝내는 내가 살았었다는 흔적조차 없어질 게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우리 삶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